HD현대가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를 가동 중인 미국에 조선소 운영 방식과 선박 설계 등에 대한 '지식 재산'을 판매한다.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현지 조선소를 인수한 한화오션과 달리 연간 40척 안팎의 선박을 건조하며 효율성을 입증한 국내 조선업의 노하우를 수출하는 방식으로 미국과의 협업에 나서는 것이다.

미 오대호 연안에 위치한 프레이저 조선소(Fraser Shipyard) 전경./ 프레이저 조선소 홈페이지 캡처

9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HD현대의 조선 부문 중간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최근 미국 해양 조선 기업인 프레이저인더스트리와 '미국 조선 산업 부흥을 위한 조선소 현대화 협력 관련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 사업은 프레이저조선소에 국내 조선소 운영 방식과 자동화·현대화 기술, 선박 설계 방식 등을 도입하는 것이다.

지난 1890년에 지어진 프레이저조선소는 미국 오대호 연안에 위치한 중소형 조선소다. 보유 중인 독(dock·선박 건조장)은 2개로 이 중 크기가 큰 제2독은 길이 253m, 폭 29m로 국내 주요 조선소 독의 절반 수준이다.

이번 사업은 현지 조선소의 수요에 맞춰 HD한국조선해양이 최적화 생산 공법 등에 대한 컨설팅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HD한국조선해양은 프레이저조선소에 선행의장 등 국내 선박 건조 방식과 중소형 조선소에서 활용도가 높은 '육상 건조 공법' 등을 도입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선행의장은 선체 블록에 전장품을 미리 설치하는 공법으로 공정 효율을 높이는 방안으로 꼽힌다. 육상에서 블록과 선체를 미리 완성한 후 선체를 독으로 옮겨 나머지 공정을 진행한다. 독을 새로 만들지 않으면서 선박 건조가 가능해 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어 하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중소형 선박 건조에 효율적이다.

프레이저조선소는 2개의 독 외에 약 33만㎡(제곱미터)의 부지가 있는데, 현재 이 중 절반 정도만 사용하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과 프레이저는 남은 부지에 이 같은 육상 건조 공법을 도입해 공정 효율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프레이저조선소는 현재 미 해양경비대(USCG)의 신형 경쇄빙선(HSC-L) 건조 사업 수주를 노리고 있다. 전체 사업 규모는 경쇄빙선 7척인데, 수주를 하게 되면 프레이저는 10년치의 일감을 얻게 된다. HD한국조선해양은 수주 결과에 따라 프레이저조선소에 향후 경쇄빙선에 특화된 야드를 구축하기 위한 방안을 전수할 계획이다.

HD한국조선해양은 이번 사업을 빠르면 3년 내에 완료하겠다는 방침이다. 현재 사업 진행을 위해 선박 생산 공법 등을 지식재산권(IP) 형태로 등록하기 위한 법적 검토를 진행 중이다.

HD현대도 지난 5일 미국 미시시피주에 위치한 잉걸스 조선소에서 '조선소 생산성 향상을 위한 시범사업'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잉걸스 조선소는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가 운영하는 곳이다.

미국 잉걸스 조선소의 작업자가 HD현대 지능형 용접 시스템을 사용해 수평 용접 작업을 하고 있다. /HD현대 제공

HD현대와 헌팅턴 잉걸스는 지난해 4월 '선박 건조 생산성 향상 및 첨단 조선 기술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한 바 있다. MOU에는 공정 자동화와 로봇·인공지능(AI) 도입을 통한 디지털 조선소 구축, 함정 건조 전문성과 역량을 결합한 생산 효율성 제고, 생산인력 교육 및 기자재 공급망 참여 등 선박 건조 전반에 대해 협업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에서 직접 조선소를 인수해 배를 건조하는 것이 아닌, 선박 관련 지식 재산을 판매하거나 공유하는 HD현대의 방식은 경쟁사인 한화오션과 대비된다.

한화오션은 지난 2024년 1억달러(약 1430억원)를 투입해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필리조선소를 인수했었다. 앞으로 50억달러(약 7조1500억원)를 쏟아부어 현재 연간 1~1.5척 수준인 이 조선소의 선박 건조 능력을 2035년까지 10척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화 필리조선소./한화 제공

조선업계 관계자는 "한화의 필리조선소는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거대한 미국 조선 시장을 선점할 수 있겠지만, 대규모 자금이 투입돼야 하고 조선업 불황이 닥칠 경우 재무 위험도 커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HD현대는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해 조선소 인수 대신 지적 재산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미국과의 협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HD현대는 향후 미국 중소형 조선소를 대상으로 이 같은 방식의 사업을 확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주로 방산과 연관돼 있는 미 대형 조선소는 접근이 어려운 편이지만, 조선업 재건을 추진 중인 미국 정부의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중소형 조선소들은 생산 설비 개선 수요가 높기 때문이다.

HD한국조선해양 관계자는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술만 파는 것이 아니라 조선소를 처음 짓는 방법부터 전수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