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년 역사의 세계 최대 선박중개업체 영국 클락슨이 이례적으로 달아오른 유조선 시장에 힘입어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 실적을 냈다. 선박을 빌리고 사고파는 거래부터 신조 발주까지 중개하는 클락슨의 실적은 세계 해운·조선 시장에서 돈이 얼마나 활발하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가늠자로 통한다.
올해 시장 판도를 바꾼 건 호르무즈 사태다. 세계 해상 석유 거래의 약 4분의 1이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운임이 치솟았고 중고선 매매와 신조 발주까지 활발해졌다. 운임 급등에 대비한 금융 거래도 늘면서 호르무즈발 충격은 세계 해운·조선 시장의 돈 흐름까지 바꿔놨다.
◇호르무즈 쇼크에 브로킹 이익 55% 급증
7일 클락슨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매출은 4억1350만파운드(약 8000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9% 늘었다. 일회성 항목을 뺀 조정 세전이익은 6150만파운드(약 1180억원)로 전년 대비 56% 증가해 역대 상반기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선박 용선과 중고선 매매, 신조 계약 등을 맡는 브로킹 부문 영업이익은 1년 전보다 55% 뛴 6480만파운드(약 1240억원)로, 최고치를 새로 썼다.
클락슨 같은 중개회사는 용선의 경우 통상 운임의 1.25% 안팎, 선박 매매는 선가의 약 1%를 수수료로 받는다. 운임과 뱃값이 오르는 동시에 거래까지 활발해지면 중개 수익도 커지는 구조다. 호르무즈 사태 이후에는 운임·선가 상승과 거래 증가가 한꺼번에 나타났다. 최재성 클락슨코리아 대표는 "3월 이전과 이후 시장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운임 급등이 중고선 가격과 신조 발주를 차례로 밀어 올리면서 유조선 시장 전체가 빠르게 팽창했다"고 말했다.
호르무즈발 충격은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시장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한 번에 약 200만배럴의 원유를 나르는 VLCC는 중동산 원유 수송이 어려워지자 수요가 급증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등 더 먼 곳으로 원유 조달처를 돌리면서 항해 거리가 길어졌고, 한 척이 한 차례 운송을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늘었다. 같은 양의 원유를 나르는 데 더 많은 배가 필요해진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기 전 하루 5만~6만달러 수준이던 VLCC 운임은 사태 일주일 만에 20만달러 안팎까지 뛰기도 했다.
높은 운임을 곧바로 받을 수 있는 중고선도 '귀한 몸'이 됐다. 15년 된 VLCC 가격은 지난 1월 7500만달러에서 7월 1억달러로 33% 급등했다. 같은 기간 신조선 가격이 1억2850만달러에서 1억3050만달러로 1.6% 오른 것과 비교하면 중고선 가격 상승률이 신조선의 20배를 웃돈 셈이다. 새 배는 주문 후 인도까지 수년이 걸리지만 중고선은 바로 운항할 수 있어 일부 3~5년 된 선박은 신조선보다 비싸졌다.
당장 살 수 있는 중고선이 귀해지고 가격까지 치솟자, 선주들은 새 선박으로 눈을 돌렸다. 올해 상반기 전 세계 VLCC 신조 계약은 156척으로 지난해 연간 73척의 두 배를 이미 넘어섰다. 상반기 발주량만으로 1973년 이후 연간 최대 VLCC 발주 기록을 갈아치웠다. 운임이 단기간에 급등하자 선사와 화주가 가격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이용하는 운임선도거래(FFA) 등 파생상품 거래도 덩달아 활발해졌다.
◇에너지 안보에 선박 발주도 양극화… 암모니아선은 주춤
공급 불안으로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운송 수요는 커졌지만, 친환경 연료인 암모니아를 나르는 선박 발주는 상대적으로 더딘 흐름을 보이고 있다. 선박 시장에서도 에너지원에 따라 발주 온도 차가 벌어진 것이다.
한화오션은 지난달 27일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LNG선과 VLCC는 에너지 안보 강화와 공급망 재편, 장거리 운송 확대가 수요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강조했으나, 차세대 친환경 연료인 암모니아 운반선(VLAC)에 대해서는 "잠재 수요는 존재하지만, 인프라와 시장 형성이 지연되고 있어 발주 가시화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정상화되더라도 원유·가스 운송 시장이 곧바로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원유·가스 조달처가 달라졌고 이에 맞춰 선박도 장거리 항로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통항 재개와 별개로 공급망과 선박 배치가 다시 균형을 찾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해운·조선 시장의 높은 변동성은 하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며 "트럼프의 휴전 협상이 변수이기는 하지만 시장이 빨리 변화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