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이 2분기 깜짝 실적을 발표한 가운데 정유사들의 실적 개선 흐름이 하반기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최근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서 유가가 하락해 '역(逆)래깅(유가가 하락 안정될 경우 과거 비싸게 원재료를 들여왔다가 싸게 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 우려되지만, 전쟁에 따른 설비 부족으로 인해 정제마진 강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의 한 주유소에 유가 정보가 표시돼 있다. /뉴스1

30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28일(현지 시각)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9월 인도분 브렌트유 종가는 배럴당 84.09달러로 전날보다 4.8% 하락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되는 9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종가도 배럴당 79.26달러로 전날 대비 4.1% 내렸다.

국제유가는 지난 2월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큰 폭으로 상승했었다. 2월에 배럴당 60달러에서 거래됐던 브렌트유는 3월 들어 배럴당 110달러선을 넘어서기도 했다. 5월 중순 이후 미국과 이란의 종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면서 유가는 이달 초 배럴당 70달러선까지 떨어졌지만, 이후 양 측의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다시 배럴당 100달러선을 돌파했다.

지난 주말 미국은 2주 간 이어온 대(對)이란 공습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로 했다. 이란 역시 미국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서지 않으면서 양 측의 무력 충돌이 일단 소강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언제든 다시 재개될 수 있어 유가의 변동성은 하반기에도 계속 클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다만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국제유가의 등락에도 하반기 정유사들의 실적은 좋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유사들의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의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정유사들은 원유를 수입한 후 정제해 휘발유나 경유, 항공유 등 각종 석유제품을 만들어 판매한다. 정제마진이란 석유제품 판매 가격에서 원유 구매 비용과 정제 설비 가동 비용, 수송비 등을 뺀 값이다. 국내 정유 업계와 금융 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을 기준으로 삼는데, 손익분기점은 4~5달러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유안타증권에 따르면 이달 싱가포르 표준정유설비 기준 복합정제마진은 배럴당 22.9달러를 기록 중이다. 손익분기점은 물론 지난달 정제마진인 배럴당 16.41달러도 큰 폭으로 웃돈 수치다.

지난해 4분기 배럴당 10달러선을 형성했던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발발한 후 급등했다. 지난 4월에는 배럴당 36달러선을 넘어서기도 했다. 종전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유가는 약세로 돌아섰지만, 정제마진은 여전히 전쟁 전인 지난해 4분기의 2배 수준을 기록하며 강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정제마진 강세가 하반기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정제 설비의 부족이 근거로 꼽힌다. 최근 수 년 간 전세계적으로 친환경 에너지 전환 기조가 이어지면서 정제 설비 증설이 더디게 진행됐다. 여기에 지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올해 미국·이란 전쟁이 이어지면서 러시아와 중동의 정제 설비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신한투자증권은 올해 하반기 정유·화학 전망 보고서를 통해 하반기 복합정제마진이 배럴당 26달러 수준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가 급등세가 진정돼도 정유사들의 낮은 재고와 설비 부족 문제로 정제마진의 상승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진호 미래에셋증권 연구원도 "연이은 전쟁의 영향으로 정유 설비의 가동 지연이 계속되고 있어 최소 올해 말까지는 정제마진이 계속 높은 수준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 이후 호르무즈 해협에 갇혀 있던 한국 선박 중 처음으로 해협을 빠져나온 HMM의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유니버설 위너'호가 10일 원유 하역을 위해 울산 앞바다에 도착해 해상원유하역시설로 접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금융 시장과 달리 정유 업계에서는 하반기 실적 개선 여부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란 전쟁이 한창 진행됐던 상반기에 비해서는 유가가 낮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커 역래깅 부담이 커졌고, 재고자산 평가 손실도 반영될 수 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유사들은 올 상반기에 전쟁 이전 저렴하게 수입해 비축했던 원유를 정제해 비싼 값에 판매한 '래깅 효과'를 누리며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SK이노베이션의 1분기 매출액은 24조212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5.2%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2조1622억원으로 흑자 전환했다. GS칼텍스도 같은 기간 매출 13조347억원, 영업이익 1조6367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매출은 17%, 영업이익은 1310% 각각 증가했다.

2분기에도 실적 개선 흐름은 이어졌다. 이날 실적을 발표한 SK이노베이션은 2분기 매출액이 29조1572억원, 영업이익은 3조4873억원을 각각 기록했다고 밝혔다.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49.9% 급증했고, 영업이익은 흑자 전환했다. 정유 부문 자회사인 SK에너지는 지난해 2분기에 465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지만, 2분기에는 6512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아직 실적을 발표하지 않은 다른 정유사들 역시 2분기 실적 개선 전망이 많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증권사들의 이익 추정치(컨센서스)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3440억원의 손실을 봤던 에쓰오일(S-Oil)은 올 2분기에 9000억원대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추정된다. 신한투자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에쓰오일의 2분기 영업이익을 9477억원으로 예상했다.

정유사의 한 관계자는 "유가 하락에 따른 역래깅과 재고평가손실은 3분기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될 것"이라며 "업계에서는 일부 정유사의 지난달 월간 기준 정유 사업 실적이 적자로 돌아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다른 정유업계 관계자도 "유가가 지금보다 더 큰 폭으로 하락할 경우 상반기 수치와의 차이가 벌어져 정제마진 강세 효과도 반감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같은 정유 업계의 '신중론'을 두고 정부의 규제를 줄이기 위한 의도적 발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최근 정부가 석유제품이 가격 상한제를 시행하고 담합 의혹에 대한 처벌에 나서자, 정유사들이 규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반기에는 업황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미국·이란 전쟁 이후 국내 주유소 등에서 판매되는 석유제품 가격이 급등하자 지난 3월 13일부터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도매 가격에 상한선을 두는 '석유최고가격제'를 시행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검찰이 SK에너지와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등 정유 4사를 담합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 시장 관계자는 "변동성이 큰 유가와 달리 정제마진 강세는 설비 부족에 따른 구조적 문제라 하반기에도 정유사들의 실적은 개선된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석유최고가격제로 인해 높은 정제마진은 유통 가격에 그대로 반영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유가 하락으로 재고평가손실이 더해져 상반기보다는 영업이익 증가 폭이 다소 줄어들 가능성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