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선소에 한국 조선사들이 반세기 넘게 축적한 선박 설계·자동화·공정 운영 기술이 본격 투입된다. 한화오션·HD현대·삼성중공업은 23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조선협력센터 개소식에 맞춰 미국 내 조선 협력 사업 15건을 내놨다. 선박·함정 설계부터 기존 조선소 현대화, 신설 야드 구축까지 협력 대상이 구체화하면서 미국 현지 사업의 윤곽도 선명해졌다.
미국은 협력 성과를 실제 현지에서 건조한 선박 수로 판단하겠다는 기준을 분명히 했다. 이날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우리가 말만 하는 것은 소용없다"며 "궁극적으로는 한미가 협력해 함께 생산해 낸 '미국 내 선박 수'라는 단순한 수치로 이 센터를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준에 비춰보면 한화오션과 HD현대는 미국 내 건조로 이어질 경로가 상대적으로 구체적이다. 한화오션은 한화필리조선소를 기반으로 미국 상선뿐 아니라 해군 보조함과 함정 모듈 건조 사업까지 노릴 수 있다. 한화는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 개념설계 사업에도 하도급사로 참여하고 있다.
현지 조선소를 물색 중인 HD현대는 미국 해양지원선 전문그룹 에디슨 슈에스트 오프쇼어(ECO)와 컨테이너선을 공동 건조하고,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 헌팅턴잉걸스와 차세대 군수지원함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자체 미국 조선소가 없고 미 해군 사업도 아직 설계·협력 단계인 삼성중공업은 신설 야드 자동화와 LNG(액화천연가스) 벙커링선·자율 선박 기술을 앞세워 현지 사업 기반을 넓히는 단계다.
◇한화, 전략 수송함 설계 속도… HD현대는 美 조선소 현대화
한화오션은 이번 협력을 미국 함정 신조 시장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미국 함정 설계기업 레이도스 깁스 앤 콕스와 평시에는 상업용 물류선, 유사시에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나르는 글로벌 전략 수송함을 공동 설계한다. 지난 4월 포괄적 협력 양해각서(MOU)를 맺은 데 이어 이날 전문 서비스 계약을 체결하며 실제 설계 업무로 넘어갔다. 한화오션의 함정 건조 기술과 한화필리조선소의 생산 기반을 결합해 미국과 동맹국의 발주를 노린다는 구상이다.
HD현대는 이번 협력 사업에서 기존 미국 조선소를 현대화하고 생산 체계를 디지털로 전환하는 데 무게를 뒀다. 조선 중간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오대호 연안에서 선박을 건조·수리하는 프레이저 인더스트리의 설비와 공정을 진단해 자동화·현대화 방안을 제시한다. 지멘스와는 미국 조선소에 적용할 디지털 야드 모델을 공동 개발한다. 설계·생산·부품 조달·품질관리 데이터를 3차원 플랫폼으로 연결하고, 가상 조선소에서 공정을 미리 검증해 건조 지연과 재작업을 줄이는 방식이다. 이 디지털 야드 모델을 미국을 비롯한 국내외 조선소로 확대해 사업화한다는 계획이다.
HD현대삼호는 미국 타코마항 운영사에 최신 항만 크레인 4기를 공급하며 협력 범위를 항만 인프라로 넓혔다. HD현대 관계자는 "궁극적으로 미국에서 선박을 직접 건조하기 위해 현지 조선소를 계속 물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美 차세대 조선소엔 삼성重 로봇 공정 자동화 기술
삼성중공업은 당장 현지 건조 기반을 확보하기보다 새로 들어서는 미국 조선소의 생산 체계 구축과 LNG 특화선 설계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미국 자율 선박 기업 새로닉 테크놀러지스가 텍사스주 브라운즈빌에 30억달러(약 4조4000억원) 이상을 들여 짓는 차세대 조선소 '포트 알파'에는 삼성중공업의 자동화·공정 운영 기술이 적용될 전망이다. 이들은 자율운항과 인공지능(AI) 기술을 공동 연구하고 로봇 기반 생산 인프라도 함께 구축한다.
상선 분야에서는 현지 조선소와 역할을 나눴다. 삼성중공업이 설계와 LNG 기술을 제공하고 콘래드조선소가 건조를 맡아 1만2000㎥급 LNG 벙커링선을 공동 개발했다. 이 선박은 미국선급협회(ABS)의 기본설계 인증을 받아 현지 발주를 위한 설계 검증을 마쳤다.
한·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협력이 실제 선박 건조로 이어지려면 숙련 인력과 기자재 공급망도 함께 갖춰야 한다. 삼성중공업은 비거마린그룹과 용접·도장 인력을 양성하는 센터를 세우고 가상현실·증강현실(VR·AR) 교육을 도입한다.
한화오션도 한화필리조선소를 중심으로 현지 교육기관과 인력 양성 체계를 만들고 미국 제조기업의 조선 기자재 공급망 참여를 확대할 계획이다. 한국 기업의 역할이 기술 제공을 넘어 설계·생산과 인력·공급망 구축 전반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선언 넘어 실행 단계… 제도 지원이 관건
업계에서는 이번 발표를 계기로 마스가가 포괄적인 협력 선언을 넘어 본격적인 실행 단계에 들어섰다고 본다. 상당수 사업이 아직 MOU나 공동개발 단계지만, 적용 대상이 특정 조선소와 선박, 생산기술로 좁혀졌기 때문이다.
향후 핵심은 한국 기업의 기술과 투자를 실제 수주로 연결할 제도적 기반이다. 미 함정은 미국 조선소 건조가 원칙인 데다 외국계 기업이 기밀 사업에 참여하려면 별도의 보안체계를 갖춰야 한다. 상선 발주를 뒷받침할 금융·세제 지원과 인허가 단축을 담은 '미국 조선업·항만 인프라법(SHIPS for America Act)'도 아직 미 의회에 계류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의 기술 제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미국 정부가 안정적인 발주 물량과 투자 인센티브, 신속한 인허가를 뒷받침하고, 한국 기술이 적용된 미국 조선소가 얼마나 빨리 첫 선박을 내놓느냐가 마스가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