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부터 시행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개정안, 이른바 '노란봉투법'에 따라 하청노조와 처음으로 직접 교섭을 하게 된 포스코가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부터 진통을 겪고 있다. 포스코는 교섭 의무 대상이 모호해 의제별로 법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노조는 의제를 노사가 자율적인 합의로 결정해 빠르게 교섭을 시작하자며 맞서고 있는 것이다.
21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난 14일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포스코사내하청 광양지회가 신청한 노동쟁의 조정 신청에 대해 '조정 중지'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 포스코사내하청광양지회(이하 하청노조)는 합법적인 파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됐다.
하청노조가 쟁의 조정 신청에 나선 것은 원청인 포스코와의 교섭을 앞두고 대상과 범위에 대한 의견 차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양지회는 전체 안건에 대해 교섭을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사측은 노조가 전달한 교섭 요구안 항목에 대한 '사용자성' 인정부터 받아야 한다는 뜻을 고수하고 있다.
사용자성이란 근로자와 직접 근로 계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실질적으로 해당 근로자의 임금이나 근로조건을 결정하고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를 사용자로 인정한다는 개념을 말한다. 노조의 교섭 요구안에서 사용자성이 인정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교섭을 하겠다는 게 포스코의 입장이다.
하청노조는 지난 5월 포스코에 고용 안정·임금 인상 등의 내용이 담긴 39개 조항의 단체교섭 요구안을 전달했었다. 그러나 지난달까지 총 14차례에 걸쳐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사측이 단 한번도 응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본격적인 교섭이 진행되지 않던 상황에서 지난 13일 포스코와 하청노조 양측 교섭 실무진들은 비공식적인 협상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포스코 측은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안에 대해 '산업안전'을 제외한 나머지 의제에 대해서는 건별로 법적 판단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자성의 판단 기준인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는 지를 먼저 확인한 후 교섭 의무가 있는 의제에 대해서만 협상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사측은 노란봉투법이 처음 시행되는 상황이라 선례가 부족하고 법률적 해석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노사가 자체적으로 임의적으로 교섭을 할 수 있는지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사측이 교섭 의제로 받아들인 산업안전 항목에 대해선 경북지방노동위원회가 지난 3월 사용자성과 교섭권 범위가 인정된다고 판단을 내린 바 있다.
노란봉투법에는 원청의 사용자성에 대해 개별 의제마다 인정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도록 규정한다. 사용자성 인정 여부는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는 자'에 해당하는 지에 따라 정해진다.
하청노조는 이 같은 사측의 입장에 대해 사실상 교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개별 안건마다 법적 판단을 받게 되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어 제대로 교섭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개별 안건에 대한 사용자성 판단은 원칙적으로 판단 요청을 받은 날부터 10일, 최대 20일 안에 내리도록 돼 있다.
하청노조는 교섭 의제를 노사 간 자율적인 합의에 따라 결정하고 빠르게 교섭 절차를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섭 요구안에 담긴 임금과 복지 등의 내용이 원·하청의 계약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인 만큼 해당 법적 판단을 받지 않더라도 노사 간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게 노조의 입장이다.
의제에 대한 법적 판단 여부에 대해 노사가 대립해 교섭이 진행되지 않는 곳은 포스코 뿐이 아니다. HD현대삼호는 지난 3월 금속노조의 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하고 노란봉투법에 따라 하청노조와 교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 회사 역시 하청노조가 전달한 교섭 요구안에 대해 각 의제별 사용자성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교섭이 난항을 겪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포스코나 HD현대삼호 외에도 많은 기업이 개별 의제에 대한 법적 판단을 먼저 받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원청 입장에선 개별 의제에 대한 법적 판단 없이 전체적인 교섭에 나설 경우 여러 리스크가 생길 수 있고 하청을 통해 얻는 실익도 줄어들게 든다"며 "이 같은 위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세부적인 항목별로 교섭 대상이 맞는 지를 먼저 파악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포스코와 하청노조는 소통을 통해 교섭 의제를 정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 차를 최대한 좁혀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인광 광양지회 사무국장은 "조정 중지 결정을 통해 합법적 파업권은 확보했지만, 우선 어떻게든 교섭을 시작하자는 입장은 변함이 없다"라며 "아직까지 사측이 단 한 차례도 교섭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교섭 요구를 더 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교섭 의제 부분에서 여전히 서로 입장 차이가 있다"며 "중노위의 사용자성 판단에 대한 결정서를 세부적으로 들여다보고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포스코는 하청노조 측에 이달 말 교섭 상견례에 나서겠다는 입장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