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 주유소 입장에서 석유 최고 가격제로 편해진 게 사실이다. 자유 가격일 땐 주변 직영 주유소나 알뜰 주유소, 대형 주유소들과 출혈 경쟁을 벌였는데 우리가 리터당 30원씩 비싸게 사오니까 훨씬 불리했다. 이제 정유사 직영 빼곤 다 같은 가격에 제품을 받으니 경쟁할 필요가 없다."
경기도 양주시에서 작은 자영 주유소를 운영하는 50대 박모 씨는 석유 최고 가격제 시행 이후 가격 경쟁 압박이 줄어 마음이 편해졌다며 21일 이렇게 말했다.
박씨는 그동안 정유사로부터 주변의 대형 자영 주유소보다 비싼 가격에 기름을 공급받았다. 정유사는 운송 거리, 유통 물량 등에 따라 주유소마다 다른 가격을 책정해 공급한다. 운송 거리가 길고, 판매 물량이 적은 주유소일수록 더 비싼 가격에 기름을 받는 구조다.
지난 3월 13일 정부가 석유 최고 가격제를 시행한 후 정유사 직영 주유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자영 주유소가 정부가 정한 최고 가격 수준에서 기름을 공급받고 있다.
현재 적용 중인 7차 최고 가격은 휘발유 기준 리터당 1784원이다. 카드 수수료(27원)를 더하면 최소 원가는 1811원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인건비, 전기료, 임대료, 부가가치세 등을 고려해 주유소가 자체적으로 판매 가격을 정한다.
박씨의 경우 석유 최고 가격제 시행 이후 전국 평균 기름값과 비슷한 수준으로 가격을 매기고 있다.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1872.60원이다. 7차 최고 가격을 적용한 최소 원가 추정치와 리터당 약 61원 차이가 난다.
가격 측면에서 불리했던 영세 자영 주유소가 석유 최고 가격제 시행으로 경쟁에서 밀리지 않게 된 셈이다. 정유사 영업 사원과 기름 매입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없어졌다고 한다.
반면 취급 물량이 많아 정유사에서 더 낮은 가격에 제품을 공급받았던 대형 주유소들은 불만을 토로한다. 충남 서산에서 자영 주유소를 운영하는 정모 씨는 "전에는 주변 주유소보다 조금 싸게 팔고, 사후 정산 때 정유사로부터 수억 원을 돌려받았다"며 "지금은 영세 주유소도 같은 가격으로 붙이다 보니 파는 가격이 다 고만고만해졌다. 오히려 인건비를 감안하면 더 불리해진 것 같다"고 했다.
정부는 미국과 이란 간 전쟁 발발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자 국내 기름값 안정을 위해 3월부터 정유사의 도매 판매 가격에 상한을 두는 최고 가격제를 시행하고 있다. 정유사에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을 재정으로 메워주기로 했다.
에너지업계에선 정부의 인위적인 가격 통제가 주유소와 정유사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국민 세금으로 보조금을 받는 셈이라 경쟁 유인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 에너지 연구기관 관계자는 "이제 석유 최고 가격제에 대해 주유소든 정유사든 시장에서 아무도 반발하지 않는다. 주유소는 편하고, 정유사도 손실 보전을 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데, 당장의 주유 가격에 민감한 국민들의 저항성도 크지 않다"고 했다.
최근 중동 전쟁 재개로 최고 가격제 시행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자, 정책 부작용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기름값 상승을 인위적으로 억제한 결과로 수요가 예상만큼 줄지 않고 있는 것이 한 이유다. 고급차 보유자가 혜택을 더 크게 본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부분 자가용에 쓰이는 휘발유 소비는 지난 5월 반등했다.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에 따르면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제도 시행이 시작된 3월 799만 배럴에서 4월 689만 배럴로 줄었으나, 5월엔 775만 배럴로 다시 늘었다. 지난해 5월(729만 배럴) 대비로도 소비량이 늘었다.
이홍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석유 최고 가격제 시행의 정책적 함의와 향후 방향' 보고서에서 "석유 최고 가격제는 평시의 상시 제도보다는 단기 시장 안정 수단으로 제한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이제 최고 가격제 종료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앞서 지난 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6 한국경제보고서'에서 한국이 석유 최고 가격제와 유류세 인하를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권고하기도 했다.
양준모 연세대 교수는 "석유 최고 가격제는 대부분의 소매업자(주유소)로부터 불만을 사지 않고, 도매업자(정유사)에게도 손실을 보전한다. 모든 사업자에게 불리하지 않게 만든 정치적인 제도"라며 "세금 내는 사람이 부담하는 비효율적인 제도인데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