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이 현재 한국의 제도와 정책이 기업의 성장을 돕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국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가지 축으로 돌아가는데 가끔 자본주의를 망각한다며, 기업이 성장을 멈추게 되면 민주주의마저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 회장은 지난 15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49회 대한상의 하계포럼' 개막을 앞두고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는 과거 고성장 시대에 살았던 제도를 아직도 똑같이 갖고 있다"며 "이젠 저성장으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성장이 필요하다는 말만 할 뿐 실제로 성장을 하는 기업을 도와주는 제도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현 제도가 성장하려는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시각을 내비쳤다. 과거에는 무역을 통해 수출을 늘리면 이자 감면과 보조금 지급 등 여러 혜택을 줘 기업이 빠르게 성장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 같은 인센티브가 거의 사라지고 오히려 부담만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매출을 1년 만에 2배로 늘리고 고용을 늘려도 상을 주냐, 지원과 보조금을 주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인센티브를 줘야 기업이 성장을 하는데 우리 제도는 '작은 기업은 무조건 다 좋아져야 돼' '가난하니까 뭔가를 무조건 줘야 돼' '부자니까 계속 증세를 해야 돼'라는 등의 틀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성장 엔진이 꺼질 경우 사회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큰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는 쓴소리도 했다.
최 회장은 "우리나라는 정치 시스템은 민주주의, 경제 시스템은 자본주의로 돌아가는데 사람들은 가끔 자본주의라는 걸 완전히 망각한다"며 "두 바퀴가 옛날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쪽 바퀴가 꺼져서 성장을 못하니 민주주의도 다 문제가 생긴다"며 "성장을 하게 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이게 꺼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두 바퀴를 제대로 작동시키려면 성장을 키우는 정책으로 회귀해야 한다"며 "성장이 돼야 분배 문제도 해결된다. 성장한다고 민주주의가 훼손되거나 다른 분배 문제가 커진다고 보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 "이렇게 돈 벌 줄 몰라… 이해관계자 행복 깬다면 성과급 제도 바꿔야"
최 회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SK하이닉스의 성과급 지급 체계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도 밝혔다. SK하이닉스가 '지급액 상한이 없는 영업이익 10% 성과급' 지급 제도를 시행하면서 최근 재계에서는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그는 "누구도 돈을 이렇게 벌 줄 몰랐을 것"이라며 "그러다 보니 (성과급 지급 제도를) 그렇게 만들었을 테고 제도라는 걸 만들다 보면 어떤 이상한 상황도 마주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SK의 경영 이념에는 '회사의 목적은 구성원의 행복을 위한다'란 말이 포함돼 있지만, 스테이크홀더(Stakeholder·주주와 직원, 고객, 협력사 등 이해관계자)가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며 "구성원의 행복이 스테이크홀더의 행복을 깬다고 판단된다면 손대고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스테이크홀더에 문제를 일으키면 우리는 이것(SK하이닉스의 성과급 지급 제도)을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이야기했다"며 "조금 더 지켜봐 달라"고 덧붙였다.
◇ "반도체 수요 기하급수적 증가… '아비규환'이라 말할 정도"
앞으로 반도체 수요가 계속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최 회장은 지난 17일 하계포럼 중 가진 인공지능(AI) 관련 대담에서도 SK하이닉스의 주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대해 "메모리 수요가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니 주식을 계속 보유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는 "반도체 수요는 계속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지금 보면 올해 보다는 내년 수요가 최소 60∼100%쯤 더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급은 지금 보면 어느 회사도 내년에 늘어나는 공급량이 거의 없는 정도"라며 "올해보다 내년은 훨씬 더 갭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아비규환'이라는 이야기까지 써야 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또 반도체 생산 시설을 계속 지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시기를 대폭 앞당길 수 있을 지에 대해선 신중한 견해를 보였다. SK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이어 지난달 호남에도 대규모 반도체 산업 단지를 짓겠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미국에도 반도체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반도체 공장은 빨리 늘려야 하고 스케일도 매우 커야 한다"며 "지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지어보려고 하는 게 현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장을 45년까지 짓겠다는 것을 12년 앞당긴다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도 소화하는 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용인도 아직 용수와 전기가 완벽하게 갖춰지지 못했다"며 "장비, 건설에 요즘은 중대재해 문제도 있다. 서둘러서 한다고 또 재해를 일으킬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 회장은 재계 단체를 대표하는 역할은 이번 대한상의 회장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 예고하기도 했다. 최근 일각에서는 내년 3월 대한상의 회장의 임기가 끝나는 최 회장이 한국경제인협회를 이끌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이제는 경제 단체를 어떻게 하는 일보다 제가 더 집중해야 하는 일의 비중이 더 커질 것"이라며 "제 목소리는 내년 이후에는 많이 듣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