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에 밀려 수주에 고배를 마셨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미국 자주포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경쟁 상대는 또 나토 소속 국가들이지만, 격전지가 미국인 데다 미 육군이 한국에 우호적인 입장도 밝힌 만큼 수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3일 방위산업계 등에 따르면 미 육군은 이달 안에 차세대 자주포(MTC) 개발 사업의 시제품 제작 및 시험 평가 대상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MTC는 미 육군이 현재 운용하고 있는 M777 155㎜ 견인포를 대체할 기동 전술포다. 미 육군은 선정된 업체의 시제품을 받아 자체적으로 평가한 뒤 최종 양산 사업자를 결정할 계획이다.
미국이 MTC 도입에 속도를 내는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자주포의 운용 개념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론과 레이더 등에 의해 실시간으로 위치가 노출되기 때문에 사격 후 즉시 장소를 벗어나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에 따라 미 육군은 기존 팔라딘 자주포보다 가볍고 40초 안에 사격 준비를 마칠 수 있으며 분당 3~6발을 쏠 수 있는 차세대 기동포를 도입할 계획이다.
예산도 확보한 상태다. 미 육군이 의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MTC가 포함된 포병 연구개발 예산은 지난해 7677만 달러에서 7억919만 달러(약 1조650억원)로 824% 증액됐다. 기존 팔라딘 자주포 성능 개량에 투입하려던 예산을 MTC와 탄약운반차 사업으로 재편한 것이다.
미 육군은 확보한 예산을 시험 평가와 시제품 확보, 개발 등에 투입할 계획이다. 예산안이 확정되면 오는 10월부터 집행된다. 개발이 확정되면 신형 자주포의 양산 규모는 500문 이상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사업에 대한 미 육군의 정보 요청서(RFI)가 나온 것은 지난해 4월이다. RFI에는 플랫폼의 국내 생산, 높은 수준의 방어력, 그리고 미국산 탄약 사용 능력 등이 포함됐다. 회신한 기업들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독일 라인메탈, 미국 GDLS, 이스라엘 엘빗시스템즈, 영국 BAE 시스템즈 등이다.
미국은 최근 동맹국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동맹국의 생산 능력을 방산 공급망에 편입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미국은 중국과 장기전을 치를 경우 탄약과 장비 생산 능력이 부족하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동맹국의 생산 기반을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업계에서는 미국이 자주포 제조사의 국적보다 실제 개발·생산 능력이나 공급망 구축 역량 등에 중점을 두고 최종 사업자를 선정할 것이라 보고 있다. 앞서 유럽에서 나토 동맹국들에 밀려 수주에 실패했던 한화에어로 입장에선 더 유리한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화에어로는 6조원 규모의 루마니아 차세대 보병전투장갑차(IFV)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지난 5월 발표된 사업자 선정에서 고배를 마셨다. 현지 생산율 80%에 가격도 낮은 수준으로 제시했지만,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 라인메탈을 선택했다.
라인메탈이 제시한 현지 생산율은 40%였고, 가격 또한 한화에어로보다 높았다. 이 때문에 IFV 수주전 결과가 나온 뒤 방산업계에선 "루마니아가 같은 나토 회원국인 독일에 일감을 준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한화에어로는 이번 미국 자주포 수주전에서 신형 K9 자주포인 K9A2 플랫폼 기반의 차륜형 자주포 K9MH를 제안했다. 미국 맞춤형 모델로 미 육군이 요구하는 성능을 대부분 충족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탄약공장에 이어 미국 앨라배마주 오펠리카에 통합·시험 시설 부지를 마련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한화에어로는 K9 자주포 패키지도 경쟁사들과의 차별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K9 자주포 패키지는 K9MH에 K10 탄약운반차량도 포함된 종합 포병체계다. 미 육군 예산에는 탄약운반차가 포함돼 있는데, 라인메탈을 포함한 경쟁사들의 경우 탄약보급체계가 제외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내 분위기도 한화에어로에 우호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계기로 한국 기업들과의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댄 드리스콜 미 육군장관은 지난 4월 하원 청문회에서 "한국은 한화와 함께 매우 좋은 모델을 갖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