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은 일의 고비마다 동양의 지혜를 떠올리며 자신을 단련시켰다. 사진은 정주영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사진 현대차그룹

정주영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예전에는 그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주영의 선전물 정도로 간주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 여러 창업자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이 책은 이병철의 '호암자전'에 버금가는 훌륭한 자서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특히 생생한 삶의 체험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는 점에서는 '호암자전'을 넘어서기도 한다.

정주영은 강원도 첩첩산중 송전(松田)의 아산(峨山) 마을에서 1915년에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아산은 정주영의 호이기도 하다. 옛사람은 읍도 아니고 리를 자기 호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율곡 이이가 대표적이며 파주 율곡리에서 따온 것이다.

가난한 집안 육남 이녀의 장남 정주영은 열 살 무렵부터 농사일을 해야 했다. 그에 앞서 어린 정주영은 할아버지가 동네 서당을 열었던 훈장이었기에 여섯 살부터 아홉 살까지 한학을 익혔다. 정주영의 회고다.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천자문'으로 시작해서 '동몽선습' '소학' '대학' '맹자' '논어'를 배우고 무제시(無題詩), 연주시(聯珠詩), 당시(唐詩)도 배웠다."(이 땅에 태어나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는 이렇게 회고한다.

"서당 3년에 '소학' '대학' '자치통감(강목)' 오언시, 칠언시를 다 익힌 나에게 보통학교 공부는 배울 것이 별로 없었다."

좋았던 기억은 없고 그저 회초리가 무서워서 달달 외웠다고 한다. 그런데 두 책의 회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에 대한 언급이 많다는 것이다.

그 후 정주영은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송전소학교를 다니게 되는데 그의 최종 학력이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3년에 걸쳐 '가출 투쟁'을 거쳐 마침내 아버지를 벗어나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당시 본인은 잘 몰랐겠지만 어린 시절의 한학 공부는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본인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섯 살부터 아홉 살까지 계속한 한문 공부는 종아리를 맞아가면서 괴롭게 배웠지만 그 한문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지식 밑천의 큰 부분이 되었다."

그것은 지식보다는 지혜의 원천이자 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시 공부의 효능

공자는 '논어'에서 시를 공부했을 때의 효능에 대해 다각도로 이야기한다. 당연히 '논어'를 외우다시피 한 정주영도 알고 있었을 내용이다. 먼저 위정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시경'에 담긴 시 삼백 수를 한마디로 하자면 생각함에서부터 그릇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경' 전체를 포괄하는 정신임과 동시에 그 출발점으로 꼽는 사무사(思無邪)가 그것이다. 사람됨의 출발점은 사(邪), 즉 그릇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신실함 혹은 정직함 혹은 신뢰와 통한다. 훗날 기업가 정주영이 한결같이 강조한 '신용'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은 자로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시(詩) 300편을 외우더라도 정사를 맡겼을 때 제대로 못 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 혼자 힘으로 처결(處決)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배웠다 한들 실로 어디에다 쓰겠는가?"

공부 방법이다.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공자의 실용주의 정신을 경영자 정주영의 훗날 모습에서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주영의 유명한 어록 중 하나인 "이봐 해봤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양화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어째서 저 시를 공부하지 않는가. 시를 배우면 제대로 도리에 대한 뜻을 일으킬 수 있고 일이나 사람을 제대로 살필 수 있으며 제대로 된 사람들과 무리를 지을 수 있고 제대로 원망할 수 있다.

가깝게는(혹은 사적으로는) 부모를 섬길 수 있고 멀게는(혹은 공적으로는) 임금을 섬길 수 있다."

여기서 공자는 시 공부의 효능 네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도리에 대한 뜻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올바른 인생관을 정립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초기 창업자의 공통점은 일찍 철이 든 데 있다. 이는 전적으로 서당 공부 덕택이며 이 점에서는 이병철·정주영뿐만 아니라 LG의 구인회, 효성의 조홍제, 롯데의 신격호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다. 일찍 철이 들면 인생의 남은 시간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사람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을 갖출 수 있다. 이는 사람을 보는 거울이라는 말로, 다산 정약용은 관인지법(觀人之法)이라고 불렀는데 같은 뜻이다. 국가건 기업이건 창업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보는 법이다. 창업 과정이란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야 함과 동시에 그릇된 마음을 품는 자를 미리 걸러내야 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두세 번만 사람을 잘못 보면 창업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셋째, 뜻을 함께할 사람을 잘 알아내서 그 사람과 오래 갈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잘 알아보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되고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 또한 고스란히 '시경'과 '논어'에 담겨 있는 지혜다.

넷째, 제대로 원망한다는 것은 함께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심(邪心)이나 사심(私心)을 품은 사람이다.

이 네 가지는 창업자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국가의 대업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정주영의 시중(時中)

공자는 군자가 일을 할 때 시중해야 한다고 했다. 때, 즉 그때의 상황에 적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을 정주영은 운(運)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한다. "타고난 때에 따라 사람의 일생이 결정지어진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사주가 우리 일생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성공, 실패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모든 일에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이는 좋은 때를 절대 놓치지 않아 도약의 뜀틀로 쓰고 나쁜 때도 때가 나쁘다고 기죽는 대신 눈에 불을 켜고 최선을 다해 수습하고 비켜가고 뛰어넘어 다음 단계의 도약을 준비한다."

시중을 이처럼 정확하게 풀이한 것은 그 어떤 동양철학 안내서에서도 본 적이 없다.

정주영을 길러준 동양 고전

정주영은 일의 고비마다 동양의 지혜를 떠올리며 자기 자신을 단련시켰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고령교 복구공사를 따냈다. 그러나 준비 부족과 역량 부족 그리고 장비 부족으로 공사는 난항을 겪었고 그사이에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120배로 상승했다. 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시경' 소아(小雅)에 나오는 '포호빙하(暴虎馮河)'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수 없고 배도 없이 맨발로 황하를 건널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무리한 욕심으로 복구공사에 달려들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었다. 이후 정주영은 무엇보다 우수한 공사 장비 확보에 주안점을 두었고 새로운 사업을 할 때 더욱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포호빙하(暴虎馮河)는 '논어' 술이편에도 나온다.

공자가 안연(顏淵)에게 말했다.

"(임금이 인재로) 써주면 행하고 (임금이) 버리면 숨어 지내는 것을 오직 너하고 나만이 갖고 있구나!"

자로(子路)가 말했다.

"만일 스승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 하여 죽어도 후회할 줄 모르는 사람을 나는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일에 임하여서는 두려워하고(臨事而懼) 모의를 잘해서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과 함께할 것이다."

고령교의 경험은 정주영을 임사이구(臨事而懼)하는 경영자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 사마천 '사기' 번역, 반고 '한서' 번역, '이한우의 논어강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