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중공업이 최근 영국령 버뮤다 지역 선주로부터 수주한 2900억원 규모 원유 운반선 2척의 실제 발주자가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으로 알려졌다.

탄소 배출 규제에 따라 친환경 선박 수요와 노후 선박 교체 수요가 늘어나는 데 따라 JP모건과 같은 글로벌 금융투자사의 선박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자산운용사 등이 펀드를 만들어 선박을 확보하고 실제 배를 운영하는 회사들에 장기 임대해 수익을 내는 것이다.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원유 운반선. 원유 운반선은 가공하지 않은 원유를 직접 실어서 수송하는 선박이다. /삼성중공업

10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삼성중공업은 지난 7일 버뮤다 지역 선사와 원유 운반선 2척을 건조하는 계약을 맺었다. 15만7000DWT(재화중량톤수) 급 수에즈막스 원유 운반선이다. 계약금액은 2849억원(약 1억8599만달러)이다.

조선·해운 전문매체 트레이드윈즈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 버뮤다 선사는 JP모건 계열사로 알려졌다. 삼성중공업 측은 "계약 상대를 밝히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JP모건은 버뮤다에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해 선박을 구매하고 에너지 기업 등에 배를 장기 임대해 수익을 낸다. 버뮤다는 외국 선박의 등록이 용이한 대표적인 편의치적지다.

삼성중공업은 올 들어 버뮤다 선사로부터 7차례에 걸쳐 14척을 수주했다고 공시했다. 원유 운반선 7척,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3척, 초대형 가스운반선(VLGC) 4척으로, 총 2조7560억원 규모다. 조선업계에선 버뮤다 발주 물량을 JP모건의 발주로 추정한다.

JP모건은 150척 이상의 선박을 투자자산으로 운용하는 큰손이다. 앤드리언 다시 JP모건자산운용 글로벌트랜스포테이션그룹 대표는 지난 5월 말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조선·해운 박람회 '포시도니아 2026'에서 한 포럼에 참석해 "지난 6개월간 30척 이상의 오일 탱커와 가스 운반선을 주문했으며 계약 금액은 30억달러(약 4조5000억원) 이상"이라고 밝혔다.

그후 6~7월에도 추가 발주가 이어진 것을 감안하면 JP모건의 올해 선박 발주 규모는 더 큰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대표는 "중고 선박보다 연료 효율성이 높은 새 배를 원하는 용선사(배를 빌리는 회사)의 수요가 강하다"고 했다.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LNG 운반선. LNG 운반선은 영하 163℃로 액화된 천연가스를 실어서 운반하는 선박이다. /삼성중공업

JP모건은 한국과 중국 조선소에 물량을 나눠 발주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중국 국영 중국선박공업집단(CSSC) 산하 다롄조선소에 30만7000DWT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4척(옵션 2척 포함)을 발주했다. 2029년 인도 예정인 배다. JP모건이 VLCC 건조 주문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업계에선 JP모건이 올해 공격적으로 신규 선박 투자를 늘리는 것을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 배출 규제 강화를 고려한 움직임으로 해석한다. JP모건이 최근 발주한 배들은 2028~2029년 인도될 예정이다. IMO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8년 대비 최소 20% 감축하도록 하고 해운 에너지의 최소 5%를 탄소 배출이 없는 친환경 연료로 대체하도록 의무화한 2030년과 맞물린다. 최근 친환경 연료를 쓰는 선박 발주는 이 시점을 겨냥하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투자 자본이 조선소 독(배 건조 공간)을 선점하는 것은 배를 받을 시점의 시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 자산 가치가 오를 것이라고 본다는 신호"라고 했다.

지난 5월엔 영국 대체투자 운용사 헤이핀캐피털매니지먼트가 HD현대중공업에 7400억원 규모 LNG 운반선 2척을 발주했다. 헤이핀은 지난 3월 HD현대미포에 5만DWT MR2 석유제품 운반선 4척을 발주하기도 했다.

사모펀드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는 지난 3월 산하 선박 투자 전문 플랫폼 오션일드를 통해 HD현대중공업에 이중 연료 LNG 운반선 4척을 주문했다. 미국 가스 수출업체 체니에르와 장기 용선 계약을 미리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