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SK그룹의 '뉴(New) 이천포럼'을 시작으로 국내 주요 그룹들이 하반기 경영전략을 논의하는 회의를 시작했다. 과거에는 총수와 계열사 사장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회의를 갖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기업 규모가 거대해지고 주력하는 사업들도 세분화되면서 그룹별 전략회의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SK와 LG, 롯데 등은 총수가 큰 틀에서 전체 그룹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계열사 대표와 주요 임원들이 이를 효율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찾는 전통적인 방식의 경영전략회의를 진행한다. 반면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은 총수가 아닌 전문경영인의 주도로 각 사업별 부문장들이 나서 최적의 경영 전략을 찾는 식으로 회의를 하고 있다.
◇ SK·LG·롯데, 총수가 주도하는 전통적 '톱다운' 방식 고수
9일 재계에 따르면 주요 그룹 가운데 하반기 경영전략회의를 가장 먼저 진행한 곳은 SK다. SK는 지난달 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 동안 최태원 회장과 각 계열사 사장단을 포함한 최고 경영진이 모인 가운데 경기 이천의 SKMS연구소에서 뉴 이천포럼을 했다.
SK는 매년 6월에 열던 경영전략회의와 8월의 이천포럼을 통합한 뉴 이천포럼을 앞으로 매년 6월에 정기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올해 뉴 이천포럼의 주제는 'AI가 가져올 파괴적 혁신, AX 중심 경영으로의 대전환'이었다. 국내 그룹 총수 가운데 AX(AI Tranformaion·AI 전환)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최태원 회장이 이번 행사를 주도했다.
그는 지난 2019년부터 이천포럼에서 AI 전환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사흘 간 열린 올해 뉴 이천포럼에서도 AI를 단일 주제로 사장단과 집중 토론을 가졌다. 최 회장은 AI 전환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 '1인 1에이전트' 도입을 제시하는 등 뉴 이천포럼을 앞장서 이끌었다. 또 전세계적인 AI 컴퓨팅 파워 수요의 폭발적 증가에 대비해 에너지·데이터센터·통신망 등의 대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며, 전 계열사에 사전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LG 역시 총수인 구광모 회장이 직접 주재하는 사장단회의를 통상 분기에 한 차례씩 열어 중장기 경영전략을 논의한다. 올해 3월 회의에서는 SK와 마찬가지로 AX가 주제가 됐다. 구 회장은 배터리와 석유화학, 가전 등 그룹의 주력 사업들이 성장 한계에 부딪히고 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AI 전환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LG는 지난달에는 구 회장 주도의 사장단회의를 진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은 대신 지난달 8일 서울 여의도 LG 본사를 방문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회의를 갖고 AI와 로보틱스 분야에서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회의에는 류재철 LG전자 사장, 현신균 LG CNS 사장, 홍범식 LG유플러스 사장 등 주요 경영진이 참석했다.
현 사장을 포함한 계열사 경영진과 임원들은 이후 2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의 엔비디아 본사를 방문해 양 사의 협업을 위한 세부적인 후속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 역시 총수인 신동빈 회장이 계열사 사장단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는 정기 회의인 VCM(Value Creation Meeting)을 매년 상·하반기에 걸쳐 두 차례 진행하고 있다. 올해 1월에 이어 하반기 회의를 이달 중 열 것으로 전망된다.
신 회장은 지난 1월 VCM에서 그룹의 성장 정체와 주요 사업의 경쟁력 약화를 지적하며, 전사적으로 수익성을 높이고 재무 건전성을 개선할 것을 주문했다. 롯데는 올 상반기에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 등 주력 계열사의 실적이 호전되기도 했다.
하반기에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 종료에 따라 화학 부문 등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 만큼 환율을 포함한 여러 대외 변수에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이재용·정의선은 확인만… 현대차는 9월 '기술 포럼' 주목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은 총수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전문경영인과 주요 사업 부문장, 해외 법인장 등이 모여 경영전략회의를 갖는다. SK와 LG, 롯데 등은 총수가 큰 틀에서 그룹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거나 거대 사업의 밑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회의가 진행된다면 삼성전자, 현대차그룹은 실무의 책임자들이 구체적인 실적 개선 방안이나 판매 전략을 찾는다는 차이가 있다.
삼성전자는 양대 사업인 디바이스경험(DX) 부문과 반도체(DS) 부문의 전문경영인이 주재하는 글로벌 전략회의를 통해 중장기 사업 방향을 논의한다. 이재용 회장은 회의를 주도하거나 참석하지 않고 회의에서 도출된 결과만 보고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전략회의는 매년 6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열리는데, 올해는 지난달 16일부터 18일까지 사흘 간 열렸다.
노태문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사장)이 주재한 DX 부문 회의는 지난달 16일 MX(모바일경험) 사업부, 17일 VD(영상디스플레이)·DA(생활가전) 사업부, 18일 전사 순으로 진행됐다. DX 부문은 미국·이란 전쟁이 끝난 이후의 공급망 점검, 글로벌 수요 변화에 따른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고, AI 전환도 주요 의제로 다룬 것으로 전해졌다.
전영현 반도체(DS) 부문장(부회장)은 18일 회의를 이끌었다. DS부문은 하반기에 공급할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용 고성능 메모리의 생산·공급 상황을 점검하고 시장 수요를 분석하는 시간도 가졌다. 파운드리 사업부는 첨단 공정의 수율 개선 방안과 하반기에 문을 여는 미국 테일러 공장의 가동 준비 상황 점검 등을 집중 논의했다.
현대차그룹 역시 정의선 회장이 2선으로 물러선 가운데 완성차 수장(首長)들이 본부장, 해외 법인장 등과 함께 판매 전략을 논의하는 권역본부장 회의를 매년 상·하반기에 갖는다. 주로 반기 생산·판매 실적을 점검하고, 각 지역별로 개선 방안을 발표하는 자리다. 현대차는 호세 무뇨스 사장, 기아는 송호성 사장이 각각 이끄는 하반기 회의는 이달 중 개최될 예정이다.
하반기 권역본부장 회의에서는 상반기의 판매량 감소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각 지역별 판매량 증대 방안을 발표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부적으로 보면 미국에서는 관세와 생산량 조정, 유럽 등에서는 중국 자동차와의 경쟁에 대한 대응 방안 등이 주요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이와 별도로 오는 9월에 열리는 'HMG 테크 탤런트 포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자리에는 무뇨스 사장과 박민우 현대차·기아 AVP 본부장(사장), 만프레드 하러 R&D 본부장(사장), 아만다 맥마스터 보스턴다이나믹스 사장 등 최고경영자(CEO)와 기술 부문의 핵심 경영진이 대거 참석하며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개최된다.
이 행사는 미래 신기술 분야의 우수 인재를 초청하는 교류의 장으로 열리는데, 피지컬 AI와 완전 자율주행차 등 그룹이 집중하고 있는 기술의 개발 방향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기술 분야의 전략회의' 형태로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삼성그룹의 경우 이건희 회장이 주재하는 사장단회의가 자주 열렸고, 보통 몇 시간에서 길게는 수십 시간이 걸릴 정도로 강도 높게 진행됐다"며 "이 회장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보라'는 명언도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사장단회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은 현재 사장단이 중심이 된 '시스템 경영'의 대표 기업이 됐지만, 총수가 주도하는 회의를 결코 낡은 방식이라 평가해선 안 된다"며 "AI 전환에 그룹 전체가 사활을 걸고 있는 SK와 같은 곳은 총수의 강력한 리더십과 추진력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