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아시아에 판매하는 원유의 가격을 큰 폭으로 인하했지만, 국내 석유 가격이 떨어지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원유를 운송하는 선박이 지금도 미국·이란 전쟁으로 막혔던 호르무즈 해협의 우회 항로를 이용해 운임 비용 부담이 큰 데다, 석유 제품 최고 가격제 등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변수도 있기 때문이다.
8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8월 아시아 수출용 아랍 라이트(아랍 경질유) 공식 판매가(OSP)를 전월 대비 배럴당 11달러 내렸다. 이는 26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인하한 것이다.
아랍 라이트는 국내 정유사들이 가장 많이 수입하는 제품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정유 설비 대부분이 이 유종을 정제하는데 적합하도록 설계됐다.
이번 결정으로 8월 아랍 라이트 가격은 아시아 벤치마크인 두바이·오만유 평균 가격보다 배럴당 1.5달러 할인된 가격에 공급될 예정이다. 7월만 해도 기준 가격에 9.5달러의 웃돈이 붙었던 점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할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아람코가 8월 원유 가격을 대폭 인하한 것은 '큰 손'으로 꼽히는 아시아 고객사를 놓치지 않겠다는 목적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한국의 지난해 원유 수입량은 총 10억3000만 배럴이었는데, 이 중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입한 물량이 34.2%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미국산 원유 수입이 빠르게 늘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미국산 원유 수입량(1678만7000배럴)은 사우디산 물량(1594만6000배럴)을 앞지르기도 했다. 월별 기준으로 미국산 원유 수입이 사우디산을 넘어선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이란의 종전 합의로 호르무즈 해협의 운항이 조금씩 재개되고 있지만, 아시아 지역의 석유 수요는 줄어든 상황"이라며 "아람코가 시장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가격을 대폭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국내 정유업계는 사우디산 원유의 조달 원가가 대폭 내려갔음에도 석유제품 가격이 빠르게 떨어지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최종 도입 단가는 국가별·대륙별 원유 가격에 운임표와 각종 부대 비용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산출하기 때문에 여전히 고려할 요인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가장 큰 변수로 꼽히는 것은 바뀐 물류 환경이다. 호르무즈 해협 내 운항이 완전히 재개되지 않아 국내 정유사들의 원유 운반선은 우회 항로를 이용 중이다. 정유사들은 운임 상승 부담이 여전히 커 OSP 인하 효과가 상쇄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원유 구매 후 운송, 정제 라인 투입까지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국내 석유제품의 가격 결정 구조도 고려해야 한다. 통상 국내 주유소 판매가와 정유사 공급가는 싱가포르 석유제품 국제현물가격(MOPS)에 연동된다. OSP가 떨어져도 MOPS는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지난 3월부터 석유제품 최고 가격제에 따라 국제 현물 가격의 등락과 무관하게 정부가 설정한 상한선에 맞춰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원유 조달 원가가 낮아지더라도 정유사들이 석유제품 최고 가격제로 떠안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국내 판매 가격을 빨리 낮추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정유업계는 석유제품 최고 가격제 시행이 끝난 이후의 손실 보전 논의에 주목하고 있다. 정부는 최고 가격제 시행에 따른 정유사 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해 4조2000억원 규모의 재정을 마련해뒀다. 그러나 최근 검찰이 정유 4사를 담합 혐의로 기소하면서 손실 산정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 상황이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우선 검찰 수사와는 별개로 최고 가격제 손실 보전 절차는 계획대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