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중견 조선사들이 조선 호황을 발판으로 고부가 선박 시장 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선박 수요가 늘고 대형 조선소의 건조 슬롯이 빠듯해지면서, 선주들의 시선도 납기와 가격 경쟁력을 갖춘 중형 조선소로 넓어지는 분위기다.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중견 조선사들은 기존 탱커(액체화물 운반선)·컨테이너선 건조 경험을 바탕으로 가스선과 고효율 탱커, 대체연료 선박 설계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탱커 강점 살려 가스선·고효율선 진입
5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대한조선은 수에즈막스급(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배) 원유 운반선을 주력으로 해왔지만, 올해 하반기 영업 본격화를 목표로 초대형 액화석유가스 운반선(VLGC) 시장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조선은 최근 8만8000㎥급 VLGC 개념설계에 대해 영국 로이드선급과 한국선급으로부터 기본 인증을 받았다. 기본 인증은 선박 개념설계가 선급 규정과 안전 기준에 맞는지 1차로 검증받는 절차다.
대한조선 관계자는 "탱커 경쟁력을 기반으로 수주잔고를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 보고, 매출 확대를 위해 부가가치가 있는 셔틀탱커와 중형 컨테이너선, 가스선까지 선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며 "지금은 VLGC 후속 개발에 속도를 내는 중"이라고 했다. 대한조선은 현재까지 33억달러 규모의 선박 35척을 수주해 약 3년 6개월 치 일감을 쌓아둔 상태다.
대한조선이 새 승부수로 VLGC를 택한 건 시장 수요와 건조 효율을 함께 따진 결과다. 국내 대형 조선사들이 주력으로 하는 LNG선은 대표적인 고부가 선박이지만, 화물창 기술과 해외 라이선스 문제 등으로 진입 장벽이 높다.
대한조선은 곧장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에 뛰어들기보다, 현재 설비에서 생산 효율을 끌어올리면서도 수요 확대가 예상되는 VLGC를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VLGC는 선폭과 선체 크기를 고려할 때 도크(dock·선박 건조 시설)가 하나인 해남조선소에서도 여러 척의 공정을 동시에 진행하기에 유리해, 회사가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선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케이조선은 주력인 중형 탱커를 다목적·고효율 선박으로 고도화하고 있다. 지난달 한국선급으로부터 '파형 격벽'을 적용한 7만4000t급 석유제품운반선 설계에 대해 기본 인증을 받았다.
파형 격벽은 화물창 내부 구조를 단순화해 세척·점검·유지보수 부담을 낮추는 방식이다. 주로 5만t급 이하 선박에 쓰였지만, 케이조선은 이번 설계에서 적용 범위를 7만4000t급으로 넓혔다. 석유제품과 화학제품을 모두 실을 수 있어 선주로선 화물 운용 유연성이 커진다.
◇친환경 사양 더해 선별 수주 확대
중견 조선사들은 환경규제 대응 기술도 수주 경쟁력으로 키우고 있다. 케이조선은 동화엔텍·로이드선급과 2만2000㎥급 LNG 벙커링선을 공동 개발하는 중이다. 또 스페인 회사 등과 풍력 보조 추진 시스템을 적용한 탱커도 개발하고 있다.
대한조선도 선박 바닥에 공기층을 만들어 마찰 저항을 줄이는 공기 윤활시스템을 영국 친환경 기술 회사와 개발하고 있다. 연료비와 탄소 배출 부담을 낮출 수 있는 사양을 더해 기존 상선의 상품성을 높이려는 행보다.
HJ중공업 역시 기존 컨테이너선에 바이오연료와 자율 운항 사양을 더해 선주 선택지를 넓히고 있다. HJ중공업은 이달 초 한국선급으로부터 1만TEU급 바이오연료 추진 컨테이너선 설계의 기본 인증을 받았다. 기존 컨테이너선에 바이오연료 추진 시스템을 적용해 탄소 배출 규제에 대응할 수 있는 선박 모델을 확보한 것이다. HD현대의 자율 운항 전문 계열사 아비커스와도 HJ중공업이 건조하는 상선에 자율 운항 솔루션을 표준 탑재하는 협력을 맺었다.
중견 조선사들은 새 선종과 친환경 기술 개발을 토대로 선별 수주 기조를 강화할 예정이다. 대형 조선사들이 LNG선과 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대형·고가 선박 위주로 슬롯을 채우는 사이, 중형 탱커와 컨테이너선 시장에서도 노후선 교체와 환경규제 대응 수요가 이어지고 있다. 중견 조선사들은 기존 설비와 인력으로 지을 수 있는 선종에 친환경·고효율 사양을 더해 척당 단가와 수익성이 높은 선박으로 수주 범위를 넓히겠다는 것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중견 조선사들이 새 선종 개발을 매출 확대로 연결하려면 선주 확보, 납기 준수, 반복 건조를 통한 원가 관리까지 입증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면서도 "지금은 선주들이 납기와 가격 때문에 중견 조선사까지 눈여겨보는 이례적인 호황기인 만큼, 설계 인증을 실제 수주와 건조 실적으로 연결하는 속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