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미국 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상호관세를 위법하다고 판결한 이후 국내 수출 기업들이 미국에 납부한 관세를 돌려받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다만 자동차 품목관세가 얽혀 있는 현대차그룹은 유보적인 입장인 상황이다. 또 과거 관세 협상을 주도했던 정부는 "환급은 기업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재계에서는 관세를 중요한 성과로 꼽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 등을 고려해 현대차와 정부가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애리조나주 46시리즈 원통형 및 리튬인산철(LFP) 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 생산 공장 조감도. /LG에너지솔루션 제공

◇ 환급 신청 적극적인 배터리 업계

미국 대법원은 지난 2월 20일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이 대통령에게 포괄적 관세 부과 권한을 주지 않는다"며 대미(對美) 수출국에 부과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은 상호관세를 돌려 받을 길이 열리게 됐다.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환급 대상이 된 품목은 자동차 부품과 배터리, 전자제품, 기계 장비, 소비재 등이다. 완성차의 경우 상호관세가 아닌 품목관세로 분류돼 환급 대상이 아니다. 철강과 반도체, 알루미늄 등도 상호관세 예외 품목이라 환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30일 재계에 따르면 미국 관세 환급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곳은 배터리 업계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제조사들은 미국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하는데, 소재와 부품을 한국이나 다른 국가에서 공급 받는 상황이라 관세로 어려움을 겪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대법원 판결 후 2개월이 지난 4월부터 관세 환급 신청 절차가 개시되자 가장 발 빠르게 나섰다. 3000억원대 규모의 관세 환급을 신청해 지금껏 1000억원 이상을 돌려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LG에너지솔루션과 상황이 비슷한 다른 국내 배터리사들도 환급 신청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삼성SDI는 이미 미국 정부에 관세 환급을 신청했으며, SK온도 여러 준비 작업을 거쳐 조만간 신청에 나설 계획인 것이다.

전해액을 생산하는 엔켐을 비롯한 배터리 소재 기업들도 이미 환급을 신청해 일부 금액을 돌려받거나, 신청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현대차그룹은 신중… "미국과 관계 중요"

다른 여러 국내 수출 기업들도 환급을 신청했거나, 준비 중이다. 한국타이어는 이미 신청을 마쳤고, 미국에 법인을 둔 자동차 부품 기업들도 준비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가전제품 제조사들도 마찬가지다. 다올투자증권은 지난해 6000억원의 관세를 낸 LG전자가 관세 환급 절차를 진행했으며, 이르면 2분기에 환급이 확정돼 실적에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일부 수출 대기업들은 여전히 관세 환급에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차는 미국 관세 환급을 그룹이 큰 틀에서 방향을 정하고, 세부적인 절차는 각 계열사가 준비하는 '투 트랙' 전략으로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완성차 제조사인 현대차와 기아는 상호관세 환급을 신청하지 않을 계획이다. 완성차는 상호관세가 아닌 품목관세로 분류돼 환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현대차와 기아는 각각 미국 앨라배마주와 조지아주의 공장에서 전체 판매 물량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다. 일부 부품을 한국 등에서 조달하는 만큼 부품과 관련된 관세를 환급받을 수 있지만 금액은 미미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품 계열사들은 사정이 다르다. 현대모비스의 경우 미국 현지에서 부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품목 가운데 상당 부분을 국내에서 조달하기 때문에 환급을 신청할 경우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이 많다. 멕시코에 생산 법인을 둔 현대위아 역시 환급 대상 품목이 있다. 이들 계열사는 현재 관세 환급을 받을 수 있는 범위를 파악 중인데, 그룹의 결정이 나오면 신청을 시작할 예정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해 3월 24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2028년까지 21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재미 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백악관 방송 캡처

재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계열사들의 관세 환급 신청 여부를 신중히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신청에 나설 경우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지만, 혹여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다른 방식으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완성차 그룹인 현대차는 대표적인 관세 민간 기업이다. 관세를 신청할 경우 백악관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결 이후 공개적으로 관세 환급을 시도하는 기업들에 대해 불이익을 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지난 4월 C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관세 환급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나를 매우 잘 알기 때문일 것"이라며 "환급을 신청하지 않는 기업들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한발 물러선 정부, "통계 파악도 안해"

재계 안팎에서는 미국에 관세 환급을 신청할 수 있는 국내 수출 기업이 수가 약 6000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정부는 관세 환급에 대해서는 개별 기업들이 알아서 신청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선을 긋고 있다.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대미 수출국에 대해 상호관세와 품목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정부는 적극적인 외교전을 펼치며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나선 바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등은 지난해 관세 협상을 위해 수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정부가 관세 환급에 대해 뒤로 물러선 것은 현대차그룹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행정부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기업들의 환급 신청 여부를 지켜보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에서 만약 정부가 나서 환급을 주도할 경우 한·미 간에 통상 마찰로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은 대미 수출 비중이 높아 일본과 함께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 타깃이 됐고, 현대차그룹 역시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기업이었다"며 "다른 국가나 기업에 비해 관세 환급에 적극적으로 나설 경우 재차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정부가 관세 환급 문제에서 발을 빼면서 기업들이 고충을 겪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에 따르면 재정경제부와 관세청 등 정부 관련 부처에서는 관세 환급 대상 기업의 구체적인 수나 환급 범위 등의 실태 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한 수출 기업 관계자는 "관세 환급의 기준도 제각각이라 신청은 매우 복잡하고, 절차도 까다롭다"며 "글로벌 대관 조직을 갖춘 대기업들의 경우 발 빠르게 서류 작업과 신청 품목 등을 결정해 환급 신청까지 마친 곳도 많지만, 규모가 영세한 기업들은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혼란만 겪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