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 볼트".

지난 25일 찾은 HD현대일렉트릭 청주 배전캠퍼스 공장 1층. 한편에 있던 직원 한 명이 공장 소음을 뚫고 인근에 있는 직원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리쳤다. 이어 4만볼트까지 전압을 올리면서 생긴 '지글지글' 소리가 퍼졌다. 현장에서 만든 차단기가 4만볼트(40kV)의 전압을 1분간 견뎌내는지 검증하는 작업이 이뤄지는 과정이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청주 배전캠퍼스에서 중저압차단기를 만든다. 전압에 따라 중저압차단기와 고압차단기로 나뉘는 차단기는 전기가 흐르는 길을 열고 닫는 스위치다.

HD현대일렉트릭 청주 배전캠퍼스 내 중저압차단기 생산라인. / HD현대일렉트릭 제공

차단기는 평소에는 전류 흐름을 켜고 끄는 단순한 역할을 한다. 그러다 전선이 버틸 수 있는 양보다 너무 많은 전기가 흐르는 과전류, 피복이 벗겨진 여러 전선이 닿는 합선 등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알아서 전기를 끊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집 신발장이나 현관 근처에 있는 두꺼비집 안에는 차단기 여럿이 들어있다. 여름철 일반 가정에서 에어컨·인덕션·건조기·헤어드라이어 등 전기를 많이 먹는 가전제품을 동시에 켰을 때 두꺼비집이 내려가는 이유다.

가정이나 상가, 소규모 공장에는 중저압차단기가 설치되고 대형 공장·철도·변전소 등 1kV 이상의 전압을 사용하는 곳에는 고압차단기가 쓰인다.

때문에 차단기는 제조 과정에서 평소 사용 전압을 넘어선 고압을 견뎌내는 시험을 진행한다. HD현대일렉트릭은 중저압차단기의 한 종류인 진공차단기(VCB)의 경우, 80kV까지 견딜 수 있는지 테스트를 진행한다.

◇ '전력 르네상스', 변압기에서 배전기기로 확장

전기는 발전소에서 만들어져 가정, 공장 등 최종 소비지가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 '발전→송전→변전→배전'의 과정을 거친다. HD현대일렉트릭 등 국내 전력기기 업체가 미국 등지에서 최근 들어 수주를 이어가고 있는 초고압변압기는 주로 발전 단계에서 쓰인다.

차단기 중 고압차단기는 송전과 변전 단계에 필요하다. 중저압차단기와 '초대형 두꺼비집'에 해당하는 분전반, 전력제어시스템 등은 배전 단계에 쓰인다.

HD현대일렉트릭은 발전·송전 단계를 넘어 배전에 주목하고 있다. 그 중심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가 있다. 24시간 안전하게 전력을 공급받아야 하는 AI 데이터센터에는 중저압차단기 등 배전기기 설치가 필수다. 여기다 개수로 따지면 초고압변압기보다 더 많은 수의 배전기기가 필요하다.

이창호 HD현대일렉트릭 배전사업 본부장(부사장) / HD현대일렉트릭 제공

이창호 HD현대일렉트릭 배전사업 본부장(부사장)은 청주 배전캠퍼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예를 들어 하나의 데이터센터에 초고압변압기가 1~2대 들어간다면, 배전변압기는 전력 분산을 위해 10~20대 단위로 들어가고, 배전변압기 한 대당 수십대의 분전반이 수십 개 설치된다"며 "수요량을 기준으로 봤을 때 초고압변압기를 포함한 전력기기는 트리 상단, 배전기기는 트리 하단에 있는 트리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트리 구조로 인해 AI 데이터센터 시장 확대와 함께 배전기기 수요가 늘고 있다"며 "글로벌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청주 배전캠퍼스가 지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 청주 배전캠퍼스로 글로벌 최상급 회사 뛰어넘는 납기 경쟁력 확보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11월 청주 배전캠퍼스를 준공해 가동 중이다. 투자비는 총 1161억원으로 8만5553㎡(2만5880평) 부지에 2만2743㎡(6880평) 규모로 중저압차단기 공장을 지었다.

HD현대일렉트릭은 경기도 안성·울산·부산에 흩어져 있던 중저압차단기 생산·설계·물류 시설을 청주 배전캠퍼스에 통합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이곳에서 주택용부터 산업용에 이르는 중저압차단기 5만여 종을 생산한다.

지난해에는 북미 시장 내 유통 및 납품 과정에 필요한 UL인증을 획득하며 북미 배전기기 시장 공략을 준비 중이다. 이 부사장은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데이터센터 시장이 공략 1순위"라며 "중미, 유럽, 중동 시장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기존 글로벌 배전기기 강자 업체와 비교해 짧은 납기를 경쟁력으로 내세운다. 이 부사장은 "데이터센터용 고사양 제품인 38kV VCB의 경우 글로벌 시장 최상급 회사의 납기는 1년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HD현대일렉트릭은 청주 배전캠퍼스 구축을 통해 확대한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경쟁사 대비 절반 수준의 납기를 제시하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HD현대일렉트릭 청주 배전캠퍼스 전경. / HD현대일렉트릭 제공

청주 배전캠퍼스 중저압차단기 공장 1층에는 5개 라인, 2층에는 16개 라인이 돌아간다. 연간 생산능력은 850만대로 기존 500만대보다 70% 늘면서 공급 대응력을 확대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2030년까지 생산능력을 연간 1300만대로 늘릴 계획이다.

전력 관련 시장은 안전성과 직결되기에 시장 진입 장벽이 높았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가 맞물리면서 지금은 전력기기와 배전기기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시장은 수요자 중심에서 공급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 부사장은 "이전에는 (구매자들이) 검증된 거래처를 선호하다 보니 기존 거래처를 유지하는 관행이 있어 글로벌 최상급 회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다"며 "AI의 핵심은 스피드다. 기존 글로벌 업체의 납기가 길어지는 등 대응에 문제가 생겼기에 새로운 공급처에 대한 수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검증만 거치면 비중 있는 공급자가 될 수 있다"며 "지금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 전력기기로 치중된 사업 포트폴리오, 배전기기로 다변화 기대

HD현대일렉트릭은 배전기기 수주를 늘려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할 계획이다. 2025년 제품군별 매출 비중을 보면 전력기기(초고압 변압기, 고압차단기 등)가 69.5%로 압도적이다. 배전기기(배전반, 중저압차단기, 전력제어시스템 등)가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16.1%, 모터 등 회전기기는 14.4%다.

이 부사장은 "청주 배전캠퍼스 구축 등 배전기기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사업 포트폴리오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며 "배전기기 부문 매출은 꾸준히 우상향하고 있고 데이터센터 등 신규 수요가 더해지고 있기에 향후 배전기기 부문이 성장의 한 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부사장은 이어 "중장기적으로 배전기기 매출 비중이 약 30% 수준까지 확대되면 전력기기 중심의 매출 구조를 보완, 회사 전체의 안정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또한 배전기기 분야를 키우기 위해 울산에 있는 배전반과 배전변압기 공장을 청주 배전캠퍼스에 합치는 방향을 검토 중이다.

이 부사장은 "내부적으로 구체적인 투자 계획이나 생산 라인 확대 방안이 확정된 것은 아니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장기적으로 다양한 배전기기를 청주 배전캠퍼스에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공장 이름을 중저압차단기 공장이 아니라 배전캠퍼스라고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