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란 원유와 석유제품에 대한 수출 제재를 해제하기로 하면서 석유화학 업계가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유 4사는 기대감을 표하면서도 마냥 반기기 힘들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란산 원유는 여타 중동산 원유보다 싸기에 원가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이란 원유에 대한 제재를 해제해도 제재 대상국과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은행을 통틀어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가능성이 열려 있어 이란산 원유 도입에 선뜻 나서기 쉽지 않다. 또한 미국의 제재 이후 이란 내 유정 일부는 가동이 중단된 상태라 원유 수급이 예전처럼 원활하지 않을 수도 있다.
18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미국과 이란이 종전에 합의함에 따라 미국은 이란이 원유를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할 예정이다. WSJ은 "종전을 위한 MOU에 서면으로 서명하는 즉시 석유 판매 제재 면제 조항이 발효된다"며 "원유 판매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은행, 운송, 보험 등 필수 서비스도 제재에서 면제된다"고 전했다.
당초 미국과 양국은 오는 19일(현지 시각) 스위스에서 대면으로 만나 서면으로 MOU를 체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현지 시각으로 1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종전 합의 관련 MOU에 원격으로 서명해, 합의가 발효됐다고 전했다. 해당 보도가 맞는다면 이란 원유와 석유제품에 대한 제재는 해제됐고, 수입이 가능하다.
SK에너지·HD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GS칼텍스 등 정유 4사가 이란산 원유를 마지막으로 수입한 것은 2019년이다. 2020년부터 수입을 중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1기 행정부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체결한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고 이란산 원유를 구매하거나 이란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 금융사를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시행한 여파였다.
이후 이란은 대부분의 원유를 이른바 '그림자 함대'를 이용해 중국에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했다. 그림자 함대는 국제 사회의 제재를 피해 선박 위치와 소유권을 숨기고 원유나 천연가스와 같은 자원을 몰래 실어 나르는 선박을 말한다. 이에 기반해 중국은 석유화학제품 가격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면 국내 정유·화학사도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이란 원유 가격은 여타 중동산 원유보다 싸기 때문이다. 2015~2019년에 수입한 이란 원유 평균 단가는 배럴당 52.14달러로 이라크(53.56달러)는 물론 쿠웨이트(55.82달러), 카타르(57.77달러), 아랍에미리트(58.32달러), 사우디아라비아(57.42달러)산보다 저렴했다.
한국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 동안 수입한 이란산 원유는 총 7억436만1000배럴로 전체 수입량의 7.04%였다. 연도별로 따져보면 2017년에 수입한 이란산 원유는 전체의 13.22%, 2016년에는 10.38%로 10%를 넘어서기도 했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이란산 원유는 국내 정유사가 주로 정제하는 중질유인 데다 이미 수입해서 정제해 본 경험이 있고, 중동산 원유 중에서 싼 편"이라며 "이란산 원유 제재가 풀리는 것은 호재"라고 말했다.
다만 이란산 원유를 바로 수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우선 유럽연합(EU)으로부터 제재받을 수 있어서다. EU는 아직 이란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EU가 세컨더리 보이콧을 유지하면, 이란산 원유를 원료로 석유 제품이나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해 EU로 수출하기 힘들다.
이란 내부 상황에 의해 원유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란이 얻게 될 재정적 자유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에너지 산업은 전쟁으로 파괴된 기반 시설 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난관에 직면해 있다"며 "미국의 이란 수출 봉쇄로 인해 가동이 중단된 유정들은 재가동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