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가 특정 정유사의 기름만 판매하도록 하는 '전속 거래'와 정유사에서 기름을 먼저 공급받고 가격은 나중에 정하는 '사후 정산' 관행이 사라질 전망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주유소와 정유사 간 상생을 취지로 한 새로운 표준대리점거래계약서를 이르면 다음 달 공개할 예정이다.

주유소가 여러 정유사의 제품을 함께 취급하면 소비자 판매 가격이 낮아지는 효과가 생길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정유업계에선 제도 개편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15일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에 설치된 유가 정보판./연합뉴스

17일 공정위와 정유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4월부터 기존 석유유통업종 표준대리점거래계약서를 전면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공정위와 정유 4사(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가 계약서에 포함될 최종 문구를 두고 막바지 협의를 벌이고 있다.

새 표준대리점거래계약서의 핵심은 전속 거래와 사후 정산제 폐지다. 전속 거래제는 주유소가 계약을 맺은 정유사의 제품만을 판매하는 방식이다. 전속 거래제가 폐지되면 주유소는 다른 정유사 제품을 혼합 판매할 수 있다. 정유사 간 가격 경쟁으로 소비자 판매가가 낮아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사후 정산제는 주유소가 정유사에서 기름을 먼저 공급받고 추후 정산하는 방식이다. 주유소업계에선 정유사가 공급하는 석유 제품의 가격 기준이 불투명하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주유소가 정확한 매입 원가를 모른 채 소비자 판매가를 정하는 구조라, 유가 상승기에 소비자 가격 인상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 주유소 운영자는 "규모가 작은 주유소는 협상력이 없다 보니, 정유사 영업사원이 하자는 대로 계약을 맺는 게 일반적"이라며 "그동안 정유사가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구조였는데, 이게 바뀌면 숨통이 좀 트이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나 정유업계에선 전속 거래 폐지에 따른 혼합 판매 확대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한 주유소에서 혼합 판매가 늘어날 경우, 제품 출처가 불분명해져 품질 관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유사가 전속 계약 조건으로 주유소에 시설 지원금과 마케팅 비용 등을 제공했는데, 다른 정유사 제품을 함께 팔 경우 주유소 지원 유인도 작아진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기름을 혼합 판매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며 "타사 제품을 섞어 파는 곳에 어느 수준까지 지원을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라고 했다.

사후 정산제 폐지를 모든 주유소가 반기는 것도 아니다. 애초 사후 정산제는 필수 조건이 아니라 여러 계약 옵션 중 하나다. 현금 흐름이 좋지 않은 영세 주유소는 일종의 외상 거래인 사후 정산제를 선호하기도 한다. 주유소 입장에서 유가가 크게 요동치는 시기엔 일정 기간 평균 가격으로 사후 정산하는 것이 가격 방어 측면에서 유리한 면도 있다.

현장의 이런 우려를 반영해 공정위는 대리점주(주유소)가 원할 경우 예외적으로 사후 정산제 등 기존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조건부 조항'을 계약서에 담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새 표준대리점거래계약서는 주유소와 정유사 간 기존 계약이 만료된 후 새로 계약할 때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표준대리점거래계약서 사용이 법적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정부가 사용을 강력히 권장하는 만큼 오랜 거래 관행을 개선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공정위 관계자는 "표준 대리점 거래 계약서가 법적 강제성을 띠는 건 아니며, 각 정유사와 주유소별로 계약서 내용은 모두 다를 수 있다"며 "주유소와 정유사가 상생을 위해 사회적 합의를 맺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