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종전 합의로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리게 됐지만,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셈법은 오히려 복잡해졌다. 유가가 큰 폭으로 하락해 원가 부담을 덜게 된 점은 호재지만, 중국의 제품 과잉 공급 가능성이 다시 커지게 됐기 때문이다. 또 비싸게 들여온 원재료로 싼 값에 제품을 팔아 수익성이 악화되는 '역(逆)래깅' 효과에 대한 부담도 늘 것으로 전망된다.

롯데케미칼 대산 공장 전경. / 롯데케미칼

15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4일(현지 시각)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을 통해 "이란과의 합의가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그는 추가로 올린 글에서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료 없는 개방을 전면 승인하고, 동시에 미 해군의 봉쇄도 즉각 해제할 것"이라며 "전세계 선박들이 호르무즈 해협을 조건 없이 다시 왕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이란의 종전 합의 소식이 전해진 후 국제유가는 크게 하락했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8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은 전날보다 3.3% 하락한 배럴당 84달러에 거래됐고, 서부텍사스원유(WTI)는 4.4% 떨어진 배럴당 81달러에 거래됐다.

유가가 떨어지고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 재개로 원유 수급이 정상화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한숨을 돌리게 됐다. 석유화학 기업들은 석유를 정제해 얻는 탄소화합물인 나프타를 이용해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의 제품을 생산한다. 유가가 하락하면 나프타 가격 역시 떨어져 석유화학 업체들은 원가 부담이 줄어든다.

다만 업계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이 열리고 유가 하락이 지속될 경우 당분간 역래깅 효과로 수익성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올해 1분기에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래깅 효과(Lagging effect)'로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됐었다. 래깅 효과란 원료 구매와 석유 제품 판매의 시차로 발행하는 마진 변동을 뜻한다. 즉 석유화학 기업들은 미국·이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저렴한 가격으로 원재료를 구매했었는데, 전쟁 이후 원유와 나프타 가격이 급등하자 이를 제품 가격에 반영해 큰 이익을 거뒀던 것이다.

LG화학은 올해 1분기에 497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지만, 4133억원의 손실을 냈던 지난해 4분기에 비해선 적자 폭은 크게 줄였다. 특히 석유화학 부문에서는 165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두며 전 분기 대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롯데케미칼 역시 1분기에 735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10개 분기 만에 흑자를 냈다.

그러나 미국과 이란의 종전 합의로 국제유가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상황은 반대가 됐다. 전쟁 후 유가가 급등한 상황에서 비싸게 사들인 원재료로 만든 제품에 낮아진 원가를 반영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미국·이란 전쟁 종료와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 재개로 역래깅 효과가 일어나 석유화학 기업들의 하반기 실적이 다시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의 경우 3분기에 474억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해 적자 전환하고, 4분기에도 400억원의 영업 손실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됐다.

최근 수 년 간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침체돼 온 이유가 됐던 중국의 제품 과잉 공급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 역시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원유·나프타 수입이 막혀 애를 먹었는데, 전쟁 종료로 수급이 정상화되면서 다시 생산량을 확대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중국 석유화학 기업들의 설비가 밀집한 중국 광시성 친저우 복합산업단지. /연합뉴스

최근에는 중국 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쿠웨이트 등 중동 국가들도 잇따라 석유화학 설비를 늘리고 있어 제품 과잉 공급 우려가 더욱 커진 상황이다. 중동 산유국들은 원재료를 싸게 조달할 수 있어 원가 경쟁력이 높을 수 밖에 없다.

다만 일각에서는 종전으로 글로벌 경제를 짓눌러 온 불확실성이 제거되면서 장기적으로는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실적 개선 흐름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중동에서 전쟁 후 재건 수요가 늘어난 데다, 유가가 하락 안정될 경우 글로벌 경기도 반등할 가능성이 크다"며 "최근 진행 중인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의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 내실 있는 성장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