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려운 하드웨어 제조를 피하지 않았던 나라입니다. AI 칩부터 철강까지 전 영역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국이 AI를 잘하게 된다면 엄청난 상업적 기회가 열릴 겁니다. 이곳 스타트업들을 지원해주십시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8일 방한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택한 국내 로봇·AI 스타트업 초청 비공개 간담회에서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한국은 반도체 공급망과 제조 현장, 로봇 하드웨어를 함께 갖춘 피지컬AI의 드문 무대이고, 이 가능성이 더 큰 산업으로 이어지려면 로봇·AI 스타트업에 투자와 수요처가 함께 붙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오후 6시 30분 신라호텔 영빈관 중정에서는 이른바 '투자·협업의 장터'가 열렸습니다. 로보티즈와 에이로봇 등 엔비디아와 협업하는 로봇·AI 스타트업 대표뿐 아니라 삼성전자·현대차그룹·LG전자·네이버 등 대기업 관계자, 국내외 주요 벤처캐피털(VC), 정부 관계자 등 10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평소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인사들이 속속 모이자 초청받은 스타트업 대표들은 이 자리가 예상보다 훨씬 큰 네트워킹 기회라는 걸 실감했다고 합니다.
황 CEO는 이들 앞에서 한국이 피지컬AI 생태계를 키울 조건을 갖춘 '좋은 투자처'라고 수차례 강조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실행력과 다양한 제조업 기반,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에만 묶이지 않는 산업적 위치를 한국의 강점으로 꼽았습니다.
황 CEO는 이어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무대로 불러 "훌륭한 스타트업이 많으니 잘 키워달라"며 지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기세를 몰아 현장의 VC들을 호명하며 "스타트업에 필요한 것은 돈이니 투자를 해달라"고 독려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현장에는 실제로 돈과 수요를 쥔 곳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한국투자파트너스와 IMM인베스트먼트, 소프트뱅크벤처스 등 주요 투자사를 비롯해 HD현대, 두산, 한화오션 등 인력난과 자동화 수요가 큰 중공업·조선 관계자들도 참석했습니다. VC는 투자처를 찾고, 대기업은 현장에 적용할 기술을 살피고, 스타트업은 자금과 수요처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판을 엔비디아가 깔아준 겁니다.
스타트업 대표들이 놀란 것도 이 지점입니다. 국내에서는 대기업과 스타트업, 투자자가 한자리에 모여도 위계가 드러나기 쉬운데, 이날은 엔비디아 생태계라는 공통분모 아래 자유롭게 교류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엄윤설 에이로봇 대표는 "큰 회사와 작은 회사가 스스럼없이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번 행사는 스타트업이 투자자와 실제 수요처를 동시에 만나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고 했습니다. 공경철 엔젤로보틱스 원장은 "정부나 대기업이 부르면 서로 눈치를 볼 수 있는데, 엔비디아라는 우산 아래 들어가니 모두가 비교적 대등하게 토론하는 분위기가 됐다"며 "엔비디아가 촉매제 역할을 한 자리"라고 말했습니다.
황 CEO가 한국 피지컬AI 생태계에 투자와 협업을 독려한 것은 단순한 덕담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이날 모인 스타트업들은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로봇 시뮬레이션 플랫폼, AI 모델 개발 도구를 활용해 산업용 로봇과 휴머노이드, AI 모델을 만드는 기업들입니다. 이들이 성장하면 엔비디아 생태계도 함께 커집니다.
피지컬AI는 실제 공장과 조선소, 물류센터에서 나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성능이 고도화됩니다. 로봇 스타트업이 엔비디아 플랫폼을 활용해 제조 현장에 들어갈수록 산업 데이터와 적용 사례가 쌓입니다. 이는 다시 엔비디아의 로봇·AI 플랫폼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도체뿐 아니라 자동차·조선·전자·철강 등 제조업 기반이 다양한 한국이 피지컬AI 협력 무대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AI 개발 초기 한국의 주된 역할이 메모리 반도체 공급망에 집중됐다면, 피지컬AI 단계에서는 칩과 로봇 하드웨어, 제조 현장, 산업 데이터를 함께 갖춘 시장으로 의미가 커지고 있다고 봅니다. 황 CEO는 이번 닷새간 한국을 칩 파트너를 넘어 피지컬AI를 산업 현장에서 구현할 협력 무대로 띄웠습니다. 관심은 모였습니다. 남은 과제는 이 관심을 실제 투자와 현장 실증으로 연결하고, 국내 로봇·AI 스타트업이 조선소와 공장 등 제조 현장에서 상용화 가능성을 입증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