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6조원 규모의 루마니아 차세대 보병전투장갑차(IFV) 사업 수주전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도 독일 경쟁사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방위산업계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의 '안보 장벽'이 더 견고해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2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루마니아 국방부는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밤 11시쯤 유럽연합(EU)의 방산 금융 프로그램인 '유럽안전보장행동(SAFE)'을 통해 독일 방산기업 라인메탈그룹과 총 4건의 무기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SAFE는 EU가 회원국의 재무장을 돕기 위해 마련한 장기·저금리 대출 지원 정책이다.

라인메탈그룹이 수주한 계약은 ▲차세대 보병전투장갑차(IFV) 및 계열 차량 298대(33억3700만유로·약 5조9000억원) ▲지상 배치형 방공포 시스템 및 초단거리 이동식 대공 방어 시스템(9억8195만유로·약 1조7000억원) ▲해상 초계함 및 잠수사 지원정(9억2000만유로·약 1조6000억원) ▲35㎜ 공중폭발탄(AHEAD)(4억4975만유로·약 8000억원) 등이다. 전체 계약 규모가 56억8800만유로(약 10조원)에 이른다.

독일 라인메탈의 장갑차 '링스'./로이터 연합뉴스

한화에어로는 특히 IFV 공급에 많은 공을 들인 바 있다. 이 사업을 따내기 위해 당초 루마니아에 현지 생산율 72.7%를 제시했던 한화에어로는 핵심 부품 기술까지 이전해 최대 80%를 현지화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한화에어로는 지난 2월 루마니아 듬보비차에 K9 자주포와 K10 탄약보급차 생산 시설인 'H-ACE 유럽'을 착공한 바 있다. 반면 라인메탈은 인근 헝가리에 IFV 생산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현지 생산율을 한화에어로의 절반 수준인 40%로 제시했다.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도 한화에어로가 앞섰다. 루마니아 국방 전문 매체 디펜스 루마니아가 공개한 제안서에 따르면 한화에어로는 자체 개발한 장갑차인 '레드백' 298대를 총 28억유로(약 4조9000억원)에 공급하기로 했다. 대당 약 950만유로 수준이다.

라인메탈은 장갑차 '링스'를 25억9000만유로에 232대 판매하기로 했다. 대당 1100만유로로, 한화에어로 레드백보다 150만유로 비싸다.

이 때문에 방산업계에서는 이번 수주전의 결과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루마니아가 지난해 IFV 사업을 SAFE 프로그램을 활용한 신속 조달 방식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수의계약으로 사업자를 선정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를 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IFV 사업 외에 다른 사업들도 모두 독일이 가져간 것은 '몰아주기'로 볼 수 밖에 없다"며 "EU의 기금을 활용하는 만큼 같은 EU 회원국인 독일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지난 2월 루마니아 듬보비차에서 열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지 공장 착공식./방위사업청 제공

◇ 루마니아 수주전, EU 안보 장벽의 단면… "강력한 '세일즈 외교' 필요"

한화에어로가 루마니아 수주전에서 고배를 마신 것은 EU의 안보 장벽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 국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같은 지역 국가로부터 무기체계를 우선 조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사무총장은 "한화에어로의 레드백은 라인메탈의 링스를 이기고 호주 사업에 선정됐기 때문에 성능은 이미 정상급으로 봐야 한다"며 "루마니아가 현지화와 성능에서 앞선 한화에어로 대신 독일 업체를 선택한 것은 같은 유럽 국가와 협력의 무게추를 맞추기 위한 정치적 이유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한화에어로의 이번 수주 실패는 다른 국내 업체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 방산업체들은 최근 유럽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두터워지고 있는 안보 장벽을 넘기 위해선 정부의 지원이 수반돼 보다 정교한 외교·세일즈 전략을 가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현대로템은 루마니아와 스웨덴에 K2 전차를 수출하기 위해 논의 중이다. 지난해 10월 루마니아 경제부 장관 등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이 현대로템의 창원 공장을 방문한 바 있다. 현대로템은 폴란드 국영 방산업체 PGZ 산하 부마르 공장에 K2 전차 시설을 건설 중인데, 이를 유럽 전진 기지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대규모 무기 계약은 기업이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고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정부가 최전선에 서지 않으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한화에어로는 루마니아에서 무인지상차량(UGV) 사업 등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루마니아 UGV 사업은 수의 계약이 아닌 경쟁 입찰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