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군의 알레이버크급 유도미사일 구축함 USS 라파엘 페랄타가 지난달 24일 이란 항구로 향하려던 이란 국적 원유운반선 '허비'에 대해 해상 봉쇄를 시행하고 있다./AFP연합뉴스

당장 원유 운송에 투입할 수 있는 선박 쟁탈전이 심화하면서 유조선 시장의 가격 기준이 '선박 나이'에서 '인도 시점'으로 옮겨가고 있다. 중동 전쟁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 통항 제한이 두 달 넘게 이어지자, 건조 중인 선박 계약을 넘겨받는 리세일 거래에서는 신조선가보다 최대 35% 높은 웃돈이 붙었다. 선주들이 새 배를 발주해 2~3년 기다리는 대신 먼저 받을 수 있는 배를 찾으면서, 선령이 높아질수록 선박 가격이 떨어진다는 감가상각 공식이 사실상 무너진 것이다.

◇5년 된 초대형 원유 운반선도 새 배보다 비싸

21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중견 조선사인 대한조선에서 건조 중인 수에즈막스급(15만7000DWT) 원유 운반선 2척의 건조 계약이 최근 새 선주에게 넘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탱커 선사인 티케이탱커스가 웃돈을 내고 이 선박들을 척당 9500만달러(약 1430억원)에 사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 선박이 발주된 3년 전 당시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의 시장 평균 신조선가는 척당 약 8700만달러(약 1300억원) 수준이었다.

최근 대한조선이 수주한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 계약 금액은 척당 9000만달러(약 1350억원) 안팎인데, 리세일 가격은 이보다 약 500만달러(약 75억원)가 높다. 새로 발주하면 2029년 하반기 이후에나 받을 수 있는 선박을 2027년에 인도받기 위해 웃돈을 낸 셈이다.

중동 전쟁 이후 대규모 품귀를 빚고 있는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시장에서는 리세일 프리미엄이 더 가파르게 올랐다. 글로벌 원자재 거래 업체인 트라피구라는 중국 헝리조선소에서 내년 9월 인도를 목표로 건조 중인 VLCC를 약 1억600만달러(약 2400억원)에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운·선박 시장 데이터 분석업체 시그널오션에 따르면 VLCC 리세일 선박 가격은 일반 신조선가보다 최대 4550만달러(약 700억원) 높게 형성됐다. 중동 전쟁 직후 시장에서 거론되던 VLCC 리세일 프리미엄이 3900만달러(약 600억원)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 달여 만에 웃돈이 650만달러(약 100억원)가량 더 붙은 것이다.

이 같은 가격 역전 현상은 심화하고 있다. 통상 5년 된 선박은 신조선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리세일 선박도 인도 시점을 앞당기는 데 따른 소폭의 프리미엄이 붙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재 5년 된 VLCC는 국내 조선소에 새로 발주하는 신조선 계약가보다 약 900만달러(약 135억원) 비싸게 평가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에서 당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VLCC는 새 배가 아니어도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라며 "수에즈막스급은 최신 중고선과 신조선의 가격 차이가 사실상 사라졌고, 아프라막스급도 중고선 가격이 신조선가를 웃도는 역전 구간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급등한 운임이 웃돈 불렀다… 조선사 협상력 커진다

선주들이 높은 웃돈을 감수하는 건 운임 급등으로 선박 확보 비용을 단기간에 회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해서다. 티케이탱커스에 따르면 올 2분기 들어 수에즈막스급 스팟 운임(단기 용선 운임)은 하루 평균 12만1800달러(약 1억8000만원), 아프라막스급 운임은 하루 9만8000달러(약 1억5000만원), VLCC 운임은 하루 14만1800달러(약 2억1400만원)에 달했다. 1분기 수에즈막스 스팟 운임이 하루 약 6만2100달러(약 9300만원)였던 것과 비교하면 한 분기 만에 용선료가 2배 가까이로 뛴 것이다. 티케이탱커스 측은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막히면서 글로벌 원유·탱커 시장에 혼란이 계속 빚어지고 있고, 2분기 초 운임은 사상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동 전쟁 이후 이 지역 원유 수출은 전쟁 전보다 하루 약 1000만배럴 줄었고, 일부 선박이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VLCC 선대의 약 8%가 사실상 멈춰 섰다. 여기에 아시아 정유사들이 중동산 원유를 대체할 물량을 찾기 위해 미국 걸프만 등 대서양권 원유로 눈을 돌리면서 운항 거리도 길어졌다. 같은 물량을 나르더라도 선박이 더 오래 묶이는 구조가 되자, 시장에서 당장 쓸 수 있는 배는 더 부족해졌다.

이는 국내 조선업계의 선가 협상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선주들이 지금은 당장 받을 수 있는 배에 프리미엄을 주고 있지만, 당장 투입 가능한 탱커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인 만큼 신조선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국내 조선사들의 슬롯은 2029년 이후까지 찬 만큼 가격 협상 여지는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