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상이 원유와 석유제품 스와프를 추진하기로 한 배경으로 국내 정유사의 정제능력과 일본의 막대한 원유 비축량이 가져올 수 있는 시너지가 꼽힌다. 스와프는 공급 위기가 발생한 제품을 빌려주고 나중에 현물로 돌려받는 협력 체계다. 한국이 강점을 가진 석유 정제능력을 기반으로 일본에 석유제품을 수출하고, 일본에선 비축유를 빌려 쓰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21일 정유업계 관계자는 한일 양국이 원유·석유제품 스와프를 추진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국내 정유사의 석유 정제 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또다시 확인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비산유국이지만, 원유를 수입해 휘발유·경유·등유 등 석유제품으로 가공하는 정제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는 하루에 총 320만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일일 정제능력 기준으로 중국·미국·러시아·인도에 이어 세계 5위다.
특히 SK에너지, GS칼텍스의 정제 시설 규모는 각각 84만배럴, 80만배럴로 단일 공장 기준으로 세계 2위와 4위다. 한국 정유사는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생산 단가를 낮추는 전략을 활용한다.
이에 힘입어 국내에서 정제된 석유제품은 한국의 5대 주력 수출 품목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2025년 한 해 동안 수출한 석유제품은 455억달러어치로 반도체, 자동차, 일반기계에 이어 수출 품목 4위를 차지했다.
올해 1~3월에는 미국과 이란 전쟁으로 인한 석유제품 수출 제한이 시행됐음에도 국제 석유제품 가격이 오른 영향으로 수출액이 증가해 수출 품목 3위를 기록했다. 산유국인 미국, 호주도 한국에서 석유제품을 구입할 정도다.
반면 일본은 석유정제 능력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일본석유협회에 따르면 일본 내 19개 정유공장의 일일 석유 정제능력은 311만400배럴로 한국보다 적다. 일본의 석유 정제능력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500만배럴 정도로 한국을 압도했다.
일본은 지난 20년 동안 석유 의존도를 줄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정제시설 가동률 저하로 인한 수익성 저하를 막기 위해 정제 설비도 의도적으로 줄였다. 여기에 정제시설이 노후했다. 고도화 설비 비율이 한국보다 낮다.
대신 일본은 한국보다 원유 비축량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일본이 보유한 원유 비축량은 2억6300만배럴로 세계 3위다. 세계 1위 원유 비축량을 자랑하는 중국(13억9700만배럴), 2위 미국(4억1300만배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 원유 비축량(7900만배럴)의 3배 이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석유 수요는 꾸준히 줄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일본의 석유 수요가 1999년 4월부터 2000년 3월 사이에 정점을 찍은 이후 지금까지 40% 이상 감소했다고 집계했다. 또한 앞으로도 2050년까지 석유 수요가 40% 더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이다. 일본이 현재의 비축량을 유지한다면, 2050년에는 약 350일 치의 국내 소비량을 비축하는 셈이 된다.
일본은 각국이 독자적으로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판단, 국경을 넘는 정제능력 공유와 확보가 범아시아적인 해결책이라고 봤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이를 '파워 아시아(POWERR Asia)'라고 명명하고 지난 4월 15일 발표했다. 파워 아시아는 '광범위한 에너지 및 자원 회복력 파트너십(Partnership on Wide Energy and Resources Resilience)'의 약자다.
파워 아시아는 일본이 아세안(ASEAN) 지역에 약 100억달러의 재정 지원을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약 12억배럴에 해당하는 원유와 석유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자, 아세안 지역의 1년 치 수입량이다. 또한 파워 아시아는 새로운 원유 저장 시설을 건설하고 비상시 원유 방출을 위한 공동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데도 초점을 맞췄다.
닛케이는 "일본은 석유제품 대부분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원유 조달에만 집중하면 된다"면서도 "일본도 수요의 약 40%만 국내에서 생산하는 나프타 부족 문제를 겪고 있기에 국경을 넘어 석유 정제 능력을 공유하고 보완하는 것을 포함한 범아시아적인 접근 방식이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