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에서 'AI 전력 특수'를 맞은 국내 전력기기 제조사들이 다음 공략 대상지로 중동을 노리고 있다. 노후 전력망 교체와 데이터센터 투자로 변압기·차단기 수주가 몰리는 상황에서, 미국·이란 전쟁 종료 이후 전력망 복구와 도시 인프라 재건 수요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LS일렉트릭은 중동 전후 재건 수요를 겨냥해 두바이 법인을 중심으로 현지 수주망 재정비에 들어갔다. 경영진 차원에서 중동 전력 인프라 수요를 점검한 뒤 사우디 등 주요 시장의 전력청과 건설·설계·조달(EPC) 업체, 현지 전력기기 유통망을 상대로 사전 영업 등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력망은 전후 재건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복구해야 하는 기반 설비로 꼽힌다. 전기가 공급돼야 주거 시설과 병원, 산업단지, 항만 등 다른 인프라도 정상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중동 지역의 전력 수요도 빠르게 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중동·북아프리카(MENA) 지역 전력 수요가 2035년에는 지금보다 50%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LS일렉트릭은 과거 이라크 전쟁 이후 전력망 복구 과정에서 변전소 사업을 수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동 시장 대응을 다시 점검 중이다. 배전반과 초고압 변압기 신규 수주의 절반 이상이 현재는 북미에서 나오고 있지만, 중동에서도 향후 대형 건설·인프라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배전 솔루션과 변압기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력기기 시장에서는 한 번 검증된 제품이 후속 증설이나 연계 프로젝트에서 다시 채택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중동은 현지 전력기기 생산 기반이 크지 않아 수입 의존도가 높은 시장으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중동에서는 전력청과의 네트워크가 우선돼야 하고 현지 전력기기 유통망과 EPC 쪽 접점도 중요하다"며 "기존에 써본 제품을 다시 쓰는 경향이 있어 고객 기반을 넓히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중동 시장에서 오랜 영업 기반을 갖춘 HD현대일렉트릭은 중동 법인 외에도 두바이와 리야드 지사를 운영하며 현지 수주 네트워킹을 강화하고 있다. 작년엔 연결 기준 매출 4조795억원 중 10.3%에 달하는 4212억원을 사우디전력청에서 올렸다. 올해 1분기 중동 수주도 1억6600만달러로 전체 수주의 약 9.2%를 기록했다. 북미 수주 잔고가 전체의 69.2%로 가장 크지만, 사우디전력청을 중심으로 확보한 레퍼런스가 중동 전력망 복구와 인프라 재건 수요를 잡는 데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효성중공업도 중동 수요 확대를 주목하고 있다. 현재 전력 부문에서 중동 매출 비중은 10% 안팎이다. 효성중공업은 지난 14일 공시한 분기 보고서에서 사우디의 '비전2030' 신재생 발전 계획 등을 언급하며 "중동 국가들이 전력망 확충과 신재생에너지 발전 확대에 나서고 있어 대규모 전력 기자재 발주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진전기는 지난달 콘퍼런스콜에서 중전기 부문 매출 증가 배경으로 미주와 중동 지역 변압기 매출 확대를 꼽았다. 지난해 중전기 부문 매출에서 미주는 35%로 수출 지역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중동은 9.7%를 기록했다.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일진전기는 국내외 생산 설비 확충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력기기 업계 관계자는 "북미는 현재 전력기기 업체들의 핵심 시장이지만, 중동은 전력망 복구와 도시 인프라 투자가 맞물려 성장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장"이라며 "전력기기는 한 번 시장에 들어가면 후속 프로젝트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 현지 네트워크를 먼저 확보한 업체들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