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부터 이어진 소셜미디어 X의 생중계 화면. 컨베이어 앞에 선 휴머노이드 로봇 '피규어 03'의 개리가 소포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바코드가 아래로 향하도록 방향을 맞춰 컨베이어 위에 내려놓고, 곧바로 다음 소포를 집었다. 컨베이어벨트 위 물량이 비면 택배 꾸러미 쪽으로 몸을 구부려 소포를 다시 집어 와 분류 작업을 이어갔다. 개리가 3~4시간가량 작업해 배터리 잔량이 낮아지면 자율적으로 교대를 요청했고, '프랭크'와 '밥' 등 다른 로봇이 작업을 넘겨받았다. 여러 대의 로봇이 스스로 교대하며 50시간 넘게 소포 분류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생방송 화면 기준 52시간 동안 처리한 소포는 6만5300개로, 1개당 약 2.9초꼴이다.
피규어 03은 미국 로봇 스타트업 피규어AI가 개발한 차세대 휴머노이드다. 피규어AI는 이번 작업이 로봇 내부에 탑재된 자체 신경망 AI 모델 '헬릭스-02'를 기반으로 한 완전 자율 작동이라고 설명했다. 브렛 애드콕 피규어AI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로봇은 외부 신호에 의존하지 않고 카메라에 들어온 픽셀 정보만으로 소포의 위치와 방향을 판단한다"며 "AI 추론이 기기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이 작업을 하면 패키지 1개당 평균 약 3초가 걸리는데, 피규어 03은 이제 사람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애드콕 CEO는 여러 대의 휴머노이드가 네트워크로 연결돼 서로 통신하며 컨베이어 가동 시간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배터리가 낮아지거나 이상을 감지한 로봇은 스스로 정비 구역으로 이동하고, 대체 로봇이 작업을 이어받는 방식이다. 애드콕 CEO는 "원래 목표는 8시간 동안 가동하는 것이었지만, 고장이 나지 않아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며 "24시간 넘게 실패 없이 연속 자율 작동을 이어간 건 미지의 영역"이라고 했다.
◇시연 영상 넘어 장시간 근무 검증으로
피규어AI가 짧게 편집한 홍보 영상 대신 생중계를 택한 것은 휴머노이드 로봇의 평가 기준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휴머노이드 경쟁은 걷기, 달리기, 춤추기, 물건 집기 같은 시연 장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실제 공장과 물류 창고에서 쓰이려면 한두 차례 동작을 성공하는 것보다, 사람처럼 장시간 같은 작업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로봇 업계 관계자는 "장시간 작업에서는 로봇의 배터리 지속 시간과 관절 내구성, 손의 정밀도, 오류 대응 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며 "피규어AI의 이번 생중계에선 로봇이 손가락을 정교하게 쓰는 데엔 한계를 보였지만, 작업 속도가 빨라졌고 자율 교대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상용화 운용 역량이 몇 단계 더 올라간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 생산·물류 현장에 투입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BMW의 미국 스파턴버그 공장에는 지난해 피규어AI의 이전 모델인 '피규어 02′가 자동차 차체 공정에 투입됐다. 피규어AI에 따르면 피규어 02는 10시간 교대 근무를 수행하며 9만개 이상의 부품을 옮겼고, 누적 1250시간 이상 가동되며 BMW X3 3만대가량의 생산 과정에서 활용됐다. BMW는 올해 독일 라이프치히 공장에서도 휴머노이드 로봇 파일럿 운용을 시작했다.
상자 이동과 분류처럼 반복도가 높은 업무부터 휴머노이드 로봇에 맡기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물류 기업 GXO로지스틱스는 애질리티로보틱스, 앱트로닉, 리플렉스로보틱스 등 여러 업체의 로봇을 창고 업무에 시험하고 있다. 애질리티로보틱스의 이족 보행 로봇 '디지트'는 GXO 물류 시설에서 토트박스 이동 업무에 투입돼 실증 데이터를 쌓았고, 올해 2월 도요타 캐나다와도 로봇 서비스형 계약을 맺으며 제조 현장으로 적용 범위를 넓혔다.
◇"대량 운용 데이터 확보가 경쟁력 가른다"
업계에서는 휴머노이드 상용 실증 분야에서 중국 기업들이 한발 앞서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탄탄한 하드웨어 공급망과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실제 투입 사례를 빠르게 늘리며 현장 데이터를 쌓고 있어서다. 중국 유비테크는 올해 1월 에어버스와 항공 제조 분야 협력을 확대했고, 산업용 휴머노이드 로봇 '워커 S2'를 항공기 제조 공정에서 시험하고 있다. 워커 S2는 3분 안에 배터리를 스스로 교체해 24시간 연속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지난해 유비테크의 휴머노이드 로봇 수주액은 14억위안(약 3090억원)을 넘어섰고, 올해는 1만대 이상 생산을 목표로 양산 체제를 확대하고 있다.
또 다른 중국 로봇 기업 애지봇도 장시간 운용 성능을 강조하고 있다. 애지봇의 'A2 울트라'는 지난해 8월 24시간 야외 보행 생중계에서 원격 조종 없이 경로를 판단하고 장애물을 피했다. 이 과정에서 전원을 끄지 않고 배터리를 교체해 운용 중단 시간을 줄인 점도 부각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쑤저우에서 상하이까지 106.286㎞를 걸어 휴머노이드 로봇 최장거리 보행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 애지봇은 A2 울트라를 실제 운영 환경에 1000대 이상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로봇 기업들은 낮은 가격과 빠른 현장 투입으로 운용 데이터를 쌓고 있고, 미국 기업들은 AI 모델과 BMW·메르세데스-벤츠 같은 대형 고객사를 앞세워 추격하는 구도"라며 "결국 누가 먼저 양질의 대량 운용 데이터를 확보하느냐가 상용화 속도를 가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