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발전소 해외 수출 체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놓고 원전 업계에서 이견이 분분하다. 모회사인 한국전력과 자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국가를 나눠 각자 수주하던 원전 수출 관행을 없애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지만, 장단점에 대한 시각 차가 있기 때문이다.
한전이 대외 인지도와 협상력, 자금 동원력을 내세워 대외 협상을 주도하고 건설·시공 능력을 갖춘 한수원과 공동 주계약자로 나서는 것에 대해선 국가별로 실익이 다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형 원전 건설에 필요한 자금력이 부족한 중진국 진출에는 공동 진출이 유리할 수 있지만, 자체 자금력이 있는 미국에서는 오히려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통상부는 14일 김정관 장관 주재로 김동철 한전 사장, 김회천 한수원 사장 등이 만나 '2026년 제1차 원전수출전략협의회'를 열고 '원전 수출체계 효율화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우선 2016년부터 한전과 한수원이 나눠 맡았던 수출 국가를 통합 관리하기로 했다. 그동안 한전은 UAE·베트남·사우디아라비아·미국·남아공 등 13국을 맡았다. 한수원은 체코·필리핀·인도네시아·네덜란드·폴란드 등 25국을 담당했다. 앞으로는 국가와 상관없이 양사가 공동으로 해외 사업 개발과 주계약을 수행하되, 대외 협상과 지분 투자는 한전이, 건설·운영은 한수원이 주도하기로 했다.
또한 정부는 민관 합동으로 '원전 수출 기획위원회'를 신설해 원전 수출 기획·조정, 경제성·리스크 등에 대한 외부 검토 및 자문을 강화하기로 했다. 여기다 연내에 '원전수출진흥법'을 제정해 원전 수출 사업 개발과 타당성 조사, 발주처와의 협상·입찰·계약 등을 총괄 수행하는 '원전 수출 총괄 기관'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로 했다. 다만, 원전 수출 총괄 기관이 한전 또는 한수원으로 일원화되는 만큼, 한전이 총괄 기관을 맡을 경우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주와 다를 바 없는 구조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전, 대외 인지도·자금 조달서 유리…자금 넉넉한 미국선 '미지수'
원전 업계에선 한전과 한수원이 각각 강점을 가진 분야를 나눠 맡으면서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할 경우 위험 분산 효과가 있을 것이라 분석한다. 다만 원전 수입을 원하는 국가별 자금 융통 능력에 따라 공동 진출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원전 사업의 특성상 한전의 대외 인지도는 원전 수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한전은 한국 최초 원전 수출 사업인 UAE 바라카 원전의 주계약자였고 12개국에서 31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전은 1995년 필리핀 말라야 화력발전소 성능 복구 및 운영 사업을 시작으로 전 세계 10개국에서 17개 화력발전 사업을 수행 중이다. 또한 중국 풍력 사업과 미국 태양광 건설·운영 사업 등 7개국에서 7메가와트(MW) 규모의 신재생 산업을 벌이고 있다. 이 외에도 요르단과 멕시코 등지에서 가스 복합 화력 건설·운영 사업을 수주하며 대외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한전은 UAE 바라카 원전 건설에서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마무리한 경험도 있다. 한전은 UAE 바라카 원전의 운영사인 나와(Nawah Energy Company) 지분 18%를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82%는 UAE원자력공사(ENEC)가 보유한 합작 투자 구조다. 한전이 지분 투자에 투입한 금액은 약 12억2000만달러로 건설 비용을 포함한 전체 사업비의 약 5%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전은 UAE 바라카 원전 운영 수익, 지분 투자에 따른 배당 이익을 올해부터 정산받을 예정이다.
이에 한전의 PF 능력을 활용해 한전과 한수원이 공동으로 원전 수출에 나설 경우 자금력이 부족한 말레이시아 등 중진국 진출에는 유리할 수 있다. 체코 두코바니 원전의 경우 체코 정부가 한수원에 별도의 PF를 요청하지 않았으나, 중진국은 자금 관련 상황이 다르다.
한전 관계자는 "한전은 1990년대부터 해외 사업을 했기에 포트폴리오가 많다"며 "표면적으로 봐도 한전과 한수원은 모회사와 자회사라 외국 기관들이 판단했을 때 모회사인 한전의 신인도가 더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말레이시아와 같은 중진국이 원전을 도입하고자 할 때는 한전과 한수원에 PF 참여까지 요구할 수 있다"며 "이 경우 한전의 대외 인지도와 PF 경험이 유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처럼 자체 자금 조달이 가능한 국가에서는 한전과 한수원이 공동 주계약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오히려 낙찰 가능성을 낮추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정부는 앞으로 한전과 한수원이 원전을 수출할 경우 조인트벤처(JV) 등을 설립하고 해당 법인을 계약자로 명시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원전 업계에 따르면 한전과 한수원이 공동 혹은 단독으로 미국에 진출해 원전 건설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에선 현지 원전 관련 기업과 함께 JV 등을 설립해야 자국 안에서 원전 건설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고 한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한전의 PF 능력이 없어도 자국 안에서 자금 융통이 가능한 상황이라 한전이 공동 참여할 경우 수익을 나눌 대상만 늘어난다"며 "한수원과 미국 원전 기업이 JV를 만드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미국 진출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 한전이 원전 수출 '직접' 챙기려는 속사정
한전이 대외 인지도와 협상력, 자금 동원력을 갖추고 있으나 원전 관련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보니 한전이 공동 주계약자로 참여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는 반응도 있다. 체코 두코바니 원전을 한수원이 단독으로 따온 것을 볼 때 한수원 단독으로 충분히 원전 수주 및 건설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현재 한전은 독자적으로 원전을 수출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전이 UAE 바라카 원전 계약을 수주한 것은 2009년으로 17년 전이다. 그사이 한전 내 원전 관련 인력의 상당수는 퇴직했다. 한전의 원전 포함 연구·개발(R&D) 비용은 발전소를 직접 운영하는 한수원보다 적다. 2025년 말 기준 한전의 전체 연구 개발비는 2772억8500만원으로 한수원(5088억4900만원)의 절반을 조금 넘는 데 그친다.
그래도 기술과 시공 능력을 갖춘 한수원 입장에서 나쁘지는 않은 선택지라는 평가도 있다. UAE 바라카 원전 수출 당시와 달리 한전과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UAE 바라카 원전 수출 당시에는 한전이 주계약자였고, 한수원은 일종의 하도급 업체처럼 시공을 맡았다. 이번에 발표된 효율화 방안에 따르면 앞으로는 한전과 한수원이 동급으로 계약을 맺게 된다.
여기에 기존 기준으로 봤을 때 미국은 한전이 수출을 담당하던 국가였기에 한수원 입장에선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원전 확대를 외친 상황이라 한수원이 추가 수주를 노리고 있는 체코, 필리핀 외 미국은 원전 업계가 가장 탐내는 지역이다.
일각에선 한전과 한수원이 원전 수출 주계약자로 나서는 것이 한전의 재무 구조 개선을 위한 조치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전이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3조7842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음에도 차입금(129조8000억원)을 포함해 부채만 205조6000억원으로 재무 구조가 열악하다. 업계 관계자는 "한전은 매출의 90% 이상이 전기 판매 수익이라 전기 요금 인상이 없으면 빠른 시간 안에 재무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며 "원전을 수출하게 되면 기타 매출이 발생, 재무 구조가 개선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 한수원, 해외 단독 원전 사업서 '조 단위' 손실…"견제 장치 필요"
이번 개편안은 한전과 한수원이 1조6000억원대에 이르는 UAE 바라카 원전 추가 공사비를 두고 해외에서 벌인 집안싸움이 계기가 됐으나, 한수원이 단독으로 체결한 해외 원전 계약에서 대거 손실을 입은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역할 분담에 이어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정부 의지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한수원은 지난해 해외 원전 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리스크를 재무제표에 반영하면서 1조4346억원 규모의 공사손실충당부채를 설정했다. 이는 모회사 한전의 연결 재무제표에 그대로 반영된다.
우선 한수원은 러시아 원전 기업의 하청으로 참여 중인 이집트 엘다바 원전 건설 사업에서 공사손실충당부채 1조2146억원을 설정했다. 러시아형 원전에 맞는 기자재를 조달해야 하는 데다, 전쟁 이후 원자재 가격 상승과 물류 차질까지 겹치며 공사비가 급증했다. 한수원이 성과를 내기 위해 전쟁 중인 국가와 무리하게 계약을 맺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원전에 삼중수소 제거 설비(TRF)를 설치하는 사업에서도 2200억원의 공사 손실 충당 부채를 설정했다. 유럽의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와 기자재 비용 상승 등으로 공사가 1년 이상 지연된 데 따른 것이다.
지난해 체결한 체코 두코바니 원전 5·6호기 건설 계약에선 미국 웨스팅하우스(WEC)와 지식재산권(IP) 분쟁을 종결하기 위해 체결한 '비밀 합의문'이 논란이 됐다. 합의에 따르면 한국은 향후 50년간 북미·유럽 시장 진출이 제한되고, 원전 1기당 1조원이 넘는 비용을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해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 한 관계자는 "한수원이 원전 사업에서 너무 앞서나가면서 생기는 문제점들이 있는데, 한수원에 원전 사업을 모두 맡겨버리면 통제할 방법이 없다"며 "두 기관의 역량과 강점을 잘 활용하고 결집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