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합병(M&A)으로 통합된 항공사들이 최근 조종사들의 서열을 정하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 통합 후 서열 제도를 두고 조종사 노조가 쟁의에 나선 데 이어, 아시아나항공 화물 사업부를 인수한 에어제타도 조종사들과 사측의 갈등을 겪는 상황이다.
30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는 지난 9일 쟁의행위 찬반 표결을 열어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했다. 아시아나와의 통합 이후 시니어리티(Seniority·서열) 시스템을 어떻게 정할 지를 두고 사측과 갈등을 빚다 결국 쟁의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시니어리티란 항공사 내부의 기수와 연공 서열 등을 뜻하는 용어다.
화물 전용 항공사인 에어제타의 조종사 노조도 최근 서열 문제에 대한 사측과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자 지난 16일 인천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냈다. 에어제타는 지난 2월 아시아나 화물 사업부 인수 후 조종사들의 서열 제도를 새로 정하는 문제를 두고 전신이었던 에어인천 소속 조종사들과 사측이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한 채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항공사 통합 과정에서 조종사들의 서열 제도 문제가 민감한 이슈로 떠오른 것의 결정적인 이유는 기장 승급에 따른 급여·보상 등 경제적 문제라는 해석이 많다. 아울러 조종사 세계 특유의 엄격한 위계질서 문화도 서열 정리 문제를 두고 노사가 첨예한 갈등을 빚는 이유로 꼽힌다.
각 항공사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조종사 채용 기준과 서열 체계를 두고 있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보통 대형항공사(FSC)가 저비용항공사(LCC)보다 조종사 채용이나 기장 승급 기준이 까다로운 편이다. 같은 FSC나 LCC 안에서도 회사 규모가 크고 브랜드 가치가 높은 곳일수록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항공의 경우 조종사로 채용되기 위해선 총 1000시간 이상의 비행 경력을 갖춰야 한다. 또 부기장에서 기장으로 올라가는데 조종사로서 총 4000시간 이상의 비행 경력, 입사 후 이·착륙 횟수 350회 이상, 부기장 임명 후 5년 이상 경과, 별도의 승급 테스트 등 여러 조건이 붙는다.
아시아나항공은 조종사로서 총 300시간 이상의 비행 경력을 쌓으면 입사가 가능하다. 기장 승급 조건도 조종사로서 총 3500시간 이상의 비행 경력, 부기장 임명 후 4년 이상 경과, 이·착륙 횟수 250회 이상 등으로 대한항공에 비해 덜 까다롭다.
두 회사는 군(軍) 출신 조종사들의 처우도 다르다고 한다. 대한항공은 군과 민간 출신 조종사들의 기장 승급 기간 차이가 6개월 정도로 짧은 반면 아시아나항공은 군 출신이 약 4년 정도 빨리 승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는 양 사의 채용·승급 기준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단순히 서열을 통합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며 반발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에 비해 더 많은 비행 경력과 근속 연수를 쌓고도 기장 승진에 밀리고 더 낮은 급여를 받게 되는 경우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에어제타 조종사 노조가 통합 후 서열을 두고 반발하는 것도 기장 승급에서 밀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 화물 사업부를 품은 이후 225명의 아시아나 소속 조종사들이 합류하면서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짧은 에어제타 소속 조종사들의 승급이 늦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항공사들의 규모와 위상에 따라 조종사들의 채용·승급 기준이 차이가 나는 것은 LCC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면서 계열사였던 에어부산과 에어서울 역시 품에 안았다. 이들 두 항공사는 기존 대한항공 계열의 진에어와의 통합을 앞두고 있다. 최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통합 과정에서 조종사들의 서열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향후 세 곳의 LCC가 합쳐질 때도 비슷한 문제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진에어와 에어부산, 에어서울의 기장 승급 기준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세 항공사 모두 기장으로 올라가기 위한 최소 비행 시간은 3500시간으로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머지 세부적인 요건에서 차이가 있는 만큼 통합 과정에서 조종사들의 불만과 잡음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사전에 조종사 서열 문제를 제대로 조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조종사들이 기장 승급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는 기장과 부기장의 보상과 대우 차이가 크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대한항공은 기장의 연봉이 2억5000만원에서 3억원, 부기장은 1억원에서 1억500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다른 항공사들 역시 금액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기장의 연봉이 부기장 연봉의 2배에서 2.5배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매년 지급되는 성과급 등 다른 보상액 역시 기장과 부기장의 차이가 크다.
지휘계통 체계에서도 기장과 부기장의 위치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기장은 항공기 운항 안전에 대한 최종 책임자(PIC·Pilot In Command)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기내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다. 부기장은 기장을 보좌하며 비행에 필요한 각종 기능과 상황을 점검하는 역할을 맡는다.
상명하복 문화가 강했던 과거에 비해 상당 부분 수평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부기장의 역할은 제한돼 있고,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서 기장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통합 과정에서 기준을 어떻게 정하는 지에 따라 더 오랜 시간 비행 경력을 쌓은 조종사가 계속 부기장에 머물고, 경력이 적은 조종사가 기장으로 올라가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는 만큼 서열 문제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는 게 항공업계의 분석이다.
한 대형 항공사 관계자는 "지난달에는 오랜 기간 기장 승진을 못해 불만이 누적됐던 부기장이 기장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정도로 조종사 세계에서 서열은 매우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에 해당된다"며 "최근 통합 과정에서 조종사들과 갈등을 겪는 항공사들이 짧은 시간 안에 불만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