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채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균형을 잡고, '강남스타일' 노래에 맞춰 말춤 안무를 춘다. 막대기로 옆구리를 밀어도 중심을 잡고 걷는다. 한국 토종 로봇 기업 로보티즈가 독자 개발해 20일 공개한 이족 보행 휴머노이드 'AI 사피엔스'의 구동 모습이다. 국산 휴머노이드 로봇이 춤과 균형 제어 등 역동적인 동작을 시연해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최대 로봇 기업 유니트리가 춤추는 퍼포먼스를 내세운 건 3년 전 일이다. 유니트리는 2023년 말 이족 보행 로봇 'H1′을 처음 내놨고, 이듬해 3월 시속 11.9㎞ 달리기 시연을 공개했다. 2024년 출시된 'G1′은 콘서트 무대에서 인간 댄서와 군무를 선보였다.
이족 보행 로봇의 동적 시연 자체는 중국보다 3년 늦었지만, 로보티즈는 기능의 통합을 차별점으로 내세웠다. 유니트리는 달리기에 특화된 H1, 무대 댄스와 동작 제어에 맞춰진 G1, 격투기 동작 전용인 R1 등 기능을 모델별로 나눠 구현해왔다.
반면 AI 사피엔스는 키 130㎝, 무게 30㎏의 단일 기체로 달리기, 춤추기, 외발 서기 등 여러 기능을 소화한다. 모터를 제외한 부품 대부분을 자체 설계·조달하면서 로봇 전체를 유기적으로 통제하는 최적화 기술을 확보한 결과다. AI 사피엔스의 기술 내재화율은 97%에 달한다. 올 상반기 중 1000만원대 초·중반 가격에 출시될 예정이다.
◇25년 액추에이터 기술 노하우 집약
AI 사피엔스의 기술적 토대는 로보티즈가 25년간 개발해 판매해 온 핵심 부품 '액추에이터'다. 이는 전기 신호를 로봇 관절의 물리적 움직임으로 바꾸는 구동 장치로, 로봇의 엔진 격이다. 모터·감속기·센서·제어기·통신부를 일체화한 로보티즈의 모듈형 액추에이터는 엔비디아·구글 등 빅테크와 전 세계 대학·연구소에 공급돼왔다. 지난해 40만개 이상 주문이 들어왔지만 실제 출하는 22만개에 그쳤을 정도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AI 사피엔스에는 로보티즈가 새로 개발한 액추에이터 '다이나믹셀-Q'의 준직구동(QDD) 방식이 적용됐다. 준직구동은 감속비(모터의 회전 속도를 늦춰 힘을 키우는 비율)를 낮춰 모터 출력을 관절에 직접 전달하는 구조로, 반응 속도가 빠르고 외부 충격을 유연하게 흡수하는 것이 장점이다. 시중의 많은 휴머노이드가 QDD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나 실제 퍼포먼스 차이는 액추에이터의 정밀도와 소프트웨어 호환성에서 갈린다.
로보티즈는 여기에 시뮬레이터 학습 데이터를 실제 구동 환경에 빠르게 이식하는 'AI SIM' 기능을 내장하고, 설계도와 제어 소프트웨어를 외부에 공개하는 오픈소스 전략을 결합했다. 로보티즈 관계자는 "시뮬레이터 학습 데이터를 현실에서 갭 없이 구현하는 액추에이터 기술로 고난도 동작을 통합한 것"이라며 "시뮬레이터 학습 완료 후 실제 로봇을 정상 구동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시간으로 짧은 편에 속한다"고 말했다.
◇韓 기술 다듬어 온 사이, 시장 선점한 中
국내 로봇 업계는 그간 중국식 로봇 퍼포먼스 시연과 거리를 둬왔다. 보여주기식 동작보다는 산업 현장 투입 가능성과 기술의 완성도를 먼저 따져야 한다는 기조가 지배적이었다. 그사이 중국 업체들은 달리기·춤·격투 등의 동작을 잇따라 시연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웠다.
중국 기업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장·물류센터에 로봇을 대규모로 투입해 실증 데이터를 쌓는 방식으로 초기 시장을 빠르게 선점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출하량 1만3318대 가운데 중국 기업 제품이 약 87%를 차지했다. 양산 공급망이 갖춰지면서 생산 속도는 빨라지고 제조 원가는 더 낮아지는 선순환 궤도에 올라탔다. 업계에서는 올해 중국의 휴머노이드 생산량이 10만대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신형관 중국자본시장연구소 소장은 "중국은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600여 회사를 포함해 로봇 관련 기업만 1만개에 육박하는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갖췄다"며 "이미 1000달러 단위까지 원가를 낮춰 수천 대의 로봇을 실제 현장에 투입해 구동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 경쟁력"이라고 분석했다.
로보티즈도 이에 맞서 원가 경쟁 체제 구축과 글로벌 생태계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건비와 원재료 조달이 유리한 우즈베키스탄에 생산 기지를 구축해 올해 말부터 본격 가동하고, 연간 50만대 규모의 신규 수요에 대응할 계획이다. 김병수 로보티즈 대표는 "중국산 로봇의 공세가 거세지만, 액추에이터 원천 기술을 누가 보유했느냐가 기술 주권의 핵심"이라며 "전 세계 개발자들이 한국산 액추에이터를 표준으로 삼아 다양한 로봇을 만들어내는 글로벌 로봇 생태계를 주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