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이상 축적된 정밀 기술로 유럽 기업들이 공작기계 시장을 제패해 왔다면, 이제는 AI 전환으로 판 자체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국내 공작기계 업계는 AI 전환이 경쟁국보다 빨라 글로벌 시장의 판을 뒤흔들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김원종 한국공작기계산업협회장(DN솔루션즈 대표)은 13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국내 최대 생산 제조 기술 전시회 '심토스 2026'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같이 말했다. 첨단 산업 팽창으로 공작기계 수요 지형이 급변하는 가운데, 글로벌 경쟁의 무게 중심 역시 하드웨어 정밀도에서 AI 기술 내재화 등 소프트웨어로 이동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 국가 전략 자산 된 '마더 머신'
공작기계는 금속 부품을 깎고 다듬어 완성품을 만드는 제조업의 뼈대다. 전체 수요의 약 30%를 차지하는 자동차를 비롯해 반도체 등 IT 기기, 우주항공, 방산, 의료기기 등 전방위 산업에 필수적으로 쓰인다.
김 회장은 "반도체를 만들든 자동차를 만들든 초정밀 공작기계가 없으면 제조 라인은 그 즉시 서버린다"며 공작기계 기술력이 국가 주력 산업의 글로벌 제조 원가 경쟁력을 담보하는 가격 협상력과 외산 장비 의존도를 낮추는 기술 독립성을 좌우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공작기계 세계 6위 생산국이자 7위 소비국이다. 제조업 GDP 비중이 약 25%에 달하는 산업 구조에서 공작기계 경쟁력은 국가 제조 역량과 직결된다. 생산과 소비 양쪽에서 이 정도 균형을 갖춘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대만 등이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힌다.
막대한 범용 장비 생산량을 앞세운 중국조차 글로벌 공작기계 상위 10대 기업에는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수십 년의 노하우 없이는 구현하기 어려운 초정밀 가공 기술이 시장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5축 복합 가공기 등 이 영역의 핵심 기종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돼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김 회장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국내 방산 분야 역시, 완제품 수출이 늘면 이를 가공하는 공작기계 산업도 함께 크는 동반 성장 구조"라고 말했다.
◇ AI 데이터센터·휴머노이드가 쏘아 올린 '가공 수요 폭발'
최근 글로벌 공작기계 시장은 AI 인프라 확대로 전례 없는 구조적 호황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기준 약 834억달러(약 124조원) 규모의 전 세계 공작기계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처가 첨단 가공 장비를 빨아들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휴머노이드 로봇 분야는 공작기계 산업에도 새 먹거리로 부상했다. 데이터센터 쿨링 시스템은 물론, 휴머노이드 관절과 50여개 초정밀 부품으로 구성된 액추에이터까지 모두 고정밀 공작기계로 가공해야 하는 부품들이기 때문이다.
우주항공 산업의 발전도 고사양 장비 수요를 자극하고 있다. 김 회장은 "항공기 경량화를 위해 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이나 티타늄 같은 난삭재를 6~7m짜리 날개(윙립)로 한 번에 가공하려면 거대한 기계를 48시간 이상 연속으로 가동해야 한다"며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고정밀·고사양 가공 공정을 오차 없이 제어하기 위해 AI를 적극 활용하면서, 공작기계 산업은 기존의 단순 가공을 넘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첨단 기술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 100년 아성 깰 무기는 '소프트웨어'… 기술 격차 좁히는 韓
업계에서는 AI발 산업 재편이 국내 공작기계 기업들의 글로벌 영토를 넓힐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글로벌 공작기계 시장은 100년 이상 축적된 하드웨어 정밀 기술을 앞세운 유럽과 일본 기업들이 장악해 왔다. 그러나 김 회장은 "디지털, AI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며 "과거에는 기계가 얼마나 정밀하게 깎느냐가 경쟁력의 전부였다면, 이제는 AI가 공정 전체를 실시간으로 판단하고 제어하는 능력이 핵심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수용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은 이 전환에서 경쟁국보다 속도가 빠르다"며 "하드웨어에서 좁혀온 격차를 소프트웨어에서 역전시킬 수 있는 시기"라고 평가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국내 공작기계 업체들은 AI 기술 내재화와 더불어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한 외형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국내 1위 DN솔루션즈는 132년 업력의 독일 공작기계 강자 헬러를 지난 1월 인수하며 하이엔드 장비 라인업을 강화했다.
스맥은 사모펀드와 함께 지난해 7월 위아공작기계를 인수한 이후 기존 공작기계 역량에 전기차 배터리 검사 자동화 설비를 더하며 에너지·모빌리티 분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현대위아에서 물적분할돼 독립 법인으로 출범한 위아공작기계는 공작기계와 무인이송장비(AGV)를 연동한 자율제조 플랫폼을 전면에 내세우며 외부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다만 넘어야 할 산도 있다. 한국기계연구원은 올해 공작기계 산업이 글로벌 수요 둔화와 미국 관세 리스크 등으로 생산과 수출 모두 3~5% 수준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만성적인 숙련 인력 부족과 기술 전수 단절도 업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과제다.
김 회장은 "기업들이 신기술 개발에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만큼 정부 차원의 초기 테스트베드 제공과 함께, 창원 등 산업 기반이 밀집한 지방 거점에 우수 인재가 원활히 공급될 수 있도록 범국가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