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현장에서 마주치는 직원들의 눈빛, 장비의 가동 상태, 작업의 흐름 속에 경영의 답이 있다고 믿는다."
국내 최대 조선소인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엔 매일 새벽 5시 어둑한 야드를 홀로 돌아보는 이가 있다. 이상균(65) 대표이사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에게 야드는 HD현대중공업의 상태를 보여주는 현황판 그 자체다. 수시로 바뀌는 선박 설계가 현장에서 잘 구현되고 있는지, 수천 명의 인력과 수백만 개의 부품이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지 등을 알려면 보고서가 아니라 현장을 봐야 한다는 게 이 부회장의 지론이다. 이 부회장은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43년째 조선업 한길만 걸어왔다. 정기선 HD현대그룹 회장 시대 출범 이래 그룹의 심장인 조선·방산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정 회장은 취임과 함께 두 명의 부회장을 나란히 낙점했다. 재무·경영관리 전문가인 조영철 부회장이 그룹 전반의 전략을 맡고, 생산 전문가인 이 부회장이 조선·방산 사업의 실행 전략을 이끄는 구도다. 정 회장이 인공지능(AI)·자율운항·소형모듈원자로(SMR) 등 미래 먹거리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리면, 이를 야드에서 구현해 성과로 만들어내는 것이 이 부회장의 역할이다.
◇ '함께 가야 멀리 간다'… 현장에서 새긴 협업 철학
축구장 3개 길이와 맞먹는 30만톤(t)급 초대형 선박에는 최대 100만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수백t 무게의 강철 블록 100여 개를 2㎜ 오차 이내로 이어 붙여야 하나의 배가 완성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수천 명의 인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일하는 도크(Dock·선박 건조장) 사정상 유기적 움직임이 중요하다. 배관팀의 일정이 늦어지면 전기팀이 대기하고, 전기팀이 멈추면 의장팀의 작업이 중단되는 구조다.
인하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이 부회장은 협업 구조를 현장에서 몸으로 익혔다. 그가 일찌감치 '함께 가야 멀리 간다'는 지론을 새긴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1980년대 과장 시절부터 협업을 위해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서 합동 회의 때마다 임원들이 저마다 자기 조직의 이익을 내세우며 언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자기 일만 잘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결국 문제가 터졌고 수습하는 데 시간은 배로 걸렸다.
"제발 서로 양보 좀 하고 이쪽으로 가봅시다. 그래야 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당시 과장이었던 이 부회장은 목소리를 냈다. 이후 부서장이 된 그는 여러 부서 간 협업 체계를 세우며 꼬인 공정을 풀어냈고, 당시 함께 일했던 부서장들은 잇따라 임원으로 승진했다. 전체 공정을 보는 넓은 시야는 그를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 부회장은 지금도 임원들에게 사안을 결정할 때 두 가지를 주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하는 일이 회사 전체의 방향에 부합하는가, 내 욕심이 앞선 건 아닌가.'
◇ 현장이 멈추면 가장 먼저 투입됐다… 무너진 현장을 다시 세운 8년
1990년대 후반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선 한국의 조선업계는 순풍을 만난 듯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덮쳤고, 활로라고 생각해 무리해서 뛰어든 해양 플랜트 사업은 국제 유가 폭락 속에서 조선사를 표류 위기로 내몰았다. 2014년 당시 현대중공업도 연간 영업손실 3조원이라는 유례없는 적자를 봤고, 혹독한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이 부회장은 벼랑 끝 위기였던 2015년 전남 영암의 현대삼호중공업 생산 부문장으로 긴급 투입됐다. 구조 조정 여파로 생산 전문가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현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부회장은 공정 통제 방식을 전면 재편했다. 협력사와 수급 체계부터 다시 짰다. 현대삼호중공업이 불황 속에서도 흑자를 낼 수 있는 체력을 길렀고, 이 부회장도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18년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현대삼호중공업이 안정을 찾을 무렵인 2020년 5월 말, 이 부회장은 하루아침에 다시 전남에서 울산으로 짐을 꾸렸다. 연이은 중대 재해와 파업으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가 멈춰 서자 구원투수로 다시 한번 호출됐다. 긴 불황의 여파로 조직 문화는 허물어져 있었다.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해봤어?"로 대표되는 도전 정신 대신 패배 의식이 깊이 박혀 있었고, 일선 책임자들조차 현장 직책을 기피하는 난국이었다. 그는 울산조선소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칠판부터 구해 해결해야 할 과제를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3개월간 임직원을 만나고 현장을 뛰어다닐수록 칠판에 적힌 과제는 늘어갔다. 조직 문화부터 추스르기로 했다. 이 부회장은 직원들을 만나 "업황이 곧 회복할 테니 한번 해보자"며 독려하고 나섰다. 안전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에는 한도를 두지 않았다.
HD현대중공업이 2021년 8003억원의 대규모 적자를 냈을 때도 이 부회장은 이를 '새 출발을 위한 정산서'로 규정하고, 임직원들에게 청사진을 내놓았다. 업계 최초로 사내 유튜브에 출연해 직원들에게 분기마다 경영 현황을 설명했다. 그는 "곧 업황 반등이 예상되고 실제 수주도 쌓이고 있으니 과거에 매몰되지 말고 내일을 보자"고 했다. 조선소에서 사고가 줄자, 공정은 탄력을 받았다. 이 부회장이 수차례 강조했던 것처럼 업황도 반등했다. HD현대중공업은 2023년 영업이익 1786억원을 내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 슈퍼사이클에도 안심 못한다… 中 추격 맞설 기술·인재 승부
HD현대중공업은 조선업 슈퍼사이클을 타고 이익 규모가 가파르게 불어났다. 시장도 회사를 재평가해 주가는 3년 만에 4배 넘게 뛰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칠판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빼곡하다. 5년 안팎까지 좁혀진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맨 윗줄에 써 있다. 중국 정부의 보조금과 중국 국적 선사의 발주를 쓸어 담으며, 중국 조선소는 전 세계 수주 잔량(일감) 기준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 부회장이 임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단연코 중국이 제일 무섭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기술 엔지니어링 차별화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한국 선박이 중국 선박보다 초기 건조 비용만 놓고 보면 20%가량 비싸지만, 연비 효율과 내구성 등 선박 전 생애 주기를 따져 보면 결국 한국 선박이 경제적이라는 논리로 이 부회장은 선주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내부 기반도 다지고 있다.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가 합병해 지난해 12월 통합 HD현대중공업이 출범하면서 늘어난 도크 11개를 선종별로 재배치해, 저부가 작업을 걷어내고 고부가·고난도 선박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조선소의 고급 엔지니어링 인력을 키우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미래 방산 수출의 교두보가 될 미국 군함 시장 진출을 위해 현지 조선소 인수 등 현지 사업 거점 구축도 추진하고 있다.
조직 문화도 여전히 다잡고 있다. 이 부회장이 평소 임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솔선수범'이다. 그는 "소총수들이 마음 놓고 고지를 점령하려면 리더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포를 팡팡 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입 사원들과도 소통한다. '내가 겪었던 현장의 어려움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 부회장은 일주일에 한 권씩 경영서를 읽는다. 공감 가는 내용은 임원들에게 직접 전달한다. 그래도 여전히 가장 많은 답은 현장에서 배운다. 이 부회장은 근로자의 날 연휴 때도 출장길에 오를 예정이다. 첨단 제조 혁신 사례로 꼽히는 국내 자동차 제조업체의 해외 혁신센터가 목적지다. "리더가 앞선 기술 현장을 파악하고 있어야 구성원들에게 올바른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다"던 그의 말을 솔선수범하려는 출장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