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일렉트릭 울산 변압기 공장./HD현대일렉트릭 제공

낡고 오래된 전 세계 전력망이 각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면서 향후 10년간 9000조원에 달하는 교체 투자가 이뤄질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데이터센터 등 첨단 산업 확장에 병목 현상이 빚어지자 글로벌 전력망 투자에 가속도가 붙고 있는 것이다. 국내 전력기기 업계는 2030년까지 장기 호황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며 전례 없는 수주 실적을 쌓아 올리고 있다.

◇AI 수요 폭증에 병목 된 노후 전력망

5일 전력기기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투자은행(IB) JP모건은 최근 보고서에서 수십 년간 방치된 노후 전력망을 '국가 안보 리스크'로 규정하며 이 같은 전망을 내놨다. AI 산업 성장과 선진국의 재산업화로 전력 수요가 폭증한 데다 지정학적 위기에 따른 에너지 자립 수요까지 맞물려 전력망 투자가 각국의 필수 과제가 됐다는 분석이다. 이란 전쟁으로 에너지 공급 차질이 길어질 경우 전력망 과부하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력망 용량 부족은 이미 빅테크 기업이 밀집한 미국 내 데이터센터 개발 속도를 늦추는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미국 전력망은 국가 차원의 단일 통합망이 아닌 주와 도시 단위로 파편화돼 있다. 지역별 전력 병목을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하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일진전기는 지난달 낸 사업보고서에서 "미국 내 설치된 대형 변압기 70% 이상이 25년 넘은 노후 설비"라고 설명했다.

에너지·기술 전문 연구 기관인 블룸버그NEF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전력망 지출은 2020년 3000억달러(약 450조원)에서 지난해 4800억달러(약 720조원)로 5년 새 60% 늘었다. 여기에 2035년까지 10년간 전 세계 전력망에 5조8000억달러(약 8740조원)가 더 투입될 것으로 JP모건은 내다봤다. 지역별로는 미국 1조달러(약 1500조원), 유럽 1조1000억달러(약 1500조원), 중국을 주축으로 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엔 2조6000억달러(약 3900조원)의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예측됐다.

◇국내 전력기기, 美 전력사 뚫고 수주 질주

천문학적인 인프라 교체 투자는 국내 전력기기 업계의 수주 호황으로 직결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미국 등 핵심 전력망 프로젝트는 보수적인 인프라 산업 특성상 한국 기업이 뚫고 들어가기 힘든 무대였다. 하지만 AI 확산으로 초고압 변압기 수요가 폭증하면서 기존 시장을 과점하던 유럽 선도 전력기기 회사들의 생산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 납기가 수년씩 지연되자 대규모 양산 체제와 납기 경쟁력을 갖춘 한국 기업들로 대형 발주가 몰리며 시장 판도가 바뀌었다.

훈풍을 탄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의 해외 매출과 수주 잔고는 잇달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국내 초고압 변압기 1위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연결 기준 수출 비중이 77%에 달한다. 엑셀 에너지, 넥스트에라 에너지 등 미국 대형 유틸리티 기업을 주요 고객사로 확보하며 작년 북미 매출은 전년 대비 61% 급증한 1조6120억원을 기록했다. 수주잔고는 지난해 말 기준 9조4234억원으로 집계됐다.

미국 민간 전력회사를 주요 납품처로 두고 있는 효성중공업은 북중미 지역 매출이 1조1123억원으로 1년 전보다 52% 증가했다. 전력기기 전체 수주잔고는 15조3402억원으로 전년 대비 43% 늘었다.

LS일렉트릭의 지난해 북미 매출은 1조8791억원으로 1년 새 45% 뛰었고, 전력기기 수주잔고는 4조8902억원으로 50% 불어났다. 일진전기의 작년 전력기기 수출액은 2742억원으로 전년 대비 88% 급증했으며 수주잔고는 10억6790만달러(약 1조6000억원)를 기록했다.

◇"2030년까지 호황 지속"

국내 업계는 수주 호황이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효성중공업은 사업보고서에서 "북미 시장은 40~50년 전 건설된 노후 전력망 교체 시기와 데이터센터 전기화 수요가 맞물려 2030년까지 호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만 미국 트럼프발 관세 정책은 변수로 꼽힌다. 현재는 전력 기기 품귀로 미국 구매자들이 최대 20%에 달하는 관세를 대신 부담하고 있지만, 관세 장벽이 더 높아질 경우 가격 경쟁력에 타격을 입을 수 있어서다.

LS일렉트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상호 관세 부과 압력이 수출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효성중공업도 미국의 구리 관세 부과로 인한 원자재 비용 상승을 주요 변수로 지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