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지난 2024년 11월 27일 단행된 GS그룹의 정기 인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사장에서 승진한 홍순기 ㈜GS 부회장이었다. 당시 인사에서 허연수 GS리테일 대표가 물러나면서 전문경영인인 홍 부회장이 그룹 내 유일한 부회장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GS그룹 관계자는 "불확실한 경영 환경에서 어떤 외부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체질을 만들겠다는 허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가 담긴 인사였다"라면서 "동시에 허 회장이 추진하는 미래 성장 드라이브에 가속도를 붙이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됐다"고 말했다.
이후 2026년도 인사에서 허용수 GS에너지 사장, 허세홍 GS칼텍스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GS그룹은 현재 3인 부회장 체제가 됐다. 오너일가가 아닌 부회장은 여전히 홍 부회장이 유일하다.
◇ GS 22년 역사에서 전문경영인 최고직 '부회장' 9인 중 한 명
31일 재계에 따르면 GS그룹은 LG그룹에서 계열 분리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지주사 대표이사로 그룹 총수와 전문경영인의 '투톱 체제'를 유지해왔다.
22년 동안 GS그룹에서 부회장까지 오른 전문경영인 9명 중 ㈜GS 대표이사를 맡은 인물은 단 세 명이다. 홍 부회장에 앞서 서경석 부회장, 정택근 부회장 만이 ㈜GS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들은 1대 총수인 허창수 명예회장과 합을 맞췄다.
홍 부회장은 지난 2020년 허태수 회장 취임과 동시에 ㈜GS의 대표이사(사장)에 임명됐다. 이후 지금까지 허 회장과 공동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지주사의 대표이사는 그룹의 전체적인 전략을 조율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그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 GS그룹서 40년 '한 우물'… 최장 CFO 지낸 재무통
홍 부회장은 역대 지주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 중 최장기간 CFO를 지낸 재무통(通)이다.
1959년 부산에서 태어나 진주 대아고와 부산대 경제학과, 연세대 경제학과 석사 과정을 마쳤다. 사회생활은 대학 졸업 직후인 1986년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서 시작했다. 처음 일한 곳은 호남정유 여천공장 경리부다.
그는 1998년 외환위기 당시 LG그룹 구조조정본부 차장을 지냈고, 이후 GS와 LG의 분리 작업 과정에서도 실무를 담당했다. 2004년 GS그룹으로 이동해 GS칼텍스 재무본부 부장, GS EPS 관리 부문장(상무)을 거쳐 2007년부터 20년 가까이 지주사인 ㈜GS에서 근무 중이다.
홍 부회장은 역대 ㈜GS CFO 중 가장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켰다. 그는 2008년 12월 CFO 겸 재무팀장에 임명된 후 전무, 부사장, 사장으로 직급을 바꿔가며 ㈜GS 대표이사가 되기 전까지 11년 동안 지주사 살림을 도맡았다.
GS그룹이 계열사의 대표로 CFO 출신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홍 부회장이 ㈜GS 대표에 임명됐을 때부터 부회장 승진은 예견된 일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GS의 CFO 자리는 전문경영인의 엘리트 코스이자 계열사 대표의 등용문이었기 때문이다.
GS그룹은 역사적으로 재무 담당 임원의 역할을 중시해 왔다. 과거 허씨와 구씨 일가가 LG그룹을 공동 경영하던 시절 구씨 일가는 사업 확장 등 바깥 일을 주로 담당하고 허씨 일가는 재무·관리 등 내실을 담당했던 기조가 이어진 것이다.
홍 부회장은 CFO로 일하면서 그룹의 굵직한 인수합병(M&A) 작업을 지휘했다. 2009년 ㈜쌍용(현 GS글로벌), 2010년 DKT(현 GS엔텍), 2014년 STX에너지(현 GS E&R) 인수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2012년에는 GS에너지의 물적분할도 완료했다. CFO 시절 GS그룹의 투자와 자금 관리를 포함한 지배구조 개편을 진두지휘했다고 볼 수 있다.
홍 부회장이 부산 출신이라는 점이 지주사 대표이사이자 부회장에 낙점된 요인이라는 시각도 있다. GS그룹의 역대 지주사 비오너 대표이사는 모두 부산 경남권 태생이었다. 서경석 전 부회장은 경남 함양, 2대 대표였던 정택근 전 부회장은 경남 거창 출신이다.
◇ '포스트잇 실용주의'로 형식보다 본질 추구
홍 부회장은 겉치레와 격식 대신 효율성과 실용성에 집중하는 경영 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GS그룹 관계자는 "홍 부회장은 화려한 서식의 보고서를 꾸미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핵심 아이디어를 포스트잇에 적어 즉각 공유하는 방식을 선호한다"며 "부재 시에도 포스트잇 한 장을 홍 부회장의 책상에 붙여두는 것으로 보고를 대신할 만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홍 부회장은 신문지 위에 펜으로 도식화하며 현안을 논의하고, 구두 보고로 보고서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보고서 작성에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내용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홍 부회장은 의사 결정 역시 신속하고 명료하게 내린다.
GS그룹에서 홍 부회장과 함께 일해본 이들은 "복잡한 현안을 단칼에 정리해 핵심을 짚어내고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속도감 있게 제시하는 리더"라고 말했다.
홍 회장의 부산대 동문, 전임 사외 이사 등 복수의 인사들은 그가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이지만, 이해력과 상황 판단은 무척 빠르다고 입을 모았다.
◇ 2년 연속 재계 순위 8위 → 9위 → 10위 하락…신성장동력 모색 과제 안아
홍 부회장 앞에 놓인 과제는 적지 않다. 우선 2023년 이후 연속 2년 동안 떨어진 재계 순위를 끌어올려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5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결과'에서 GS그룹은 10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재계 순위가 한 단계 추락해 9위에서 10위가 됐다.
이 기간 자산 총액은 80조8240억원에서 79조3170억원으로 줄었다. 2024년에도 GS그룹의 재계 순위는 8위에서 9위로 떨어졌으나, 이를 회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순위가 더 떨어진 것이다.
GS그룹의 순위 하락은 주력인 정유 사업이 부진한 실적을 내고 있는 영향이 크다. GS그룹은 기업 분할 당시 LG정유(현 GS칼텍스), LG유통(현 GS리테일), LG건설(현 GS건설) 등 굵직한 계열사를 가져와 성장해 왔지만, 사업 구조는 지금껏 큰 변화가 없다. 특히 GS칼텍스가 그룹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문제는 에너지 전환과 석유화학 시장 포화로 정유 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이전보다 줄었다는 점이다. GS그룹의 또 다른 성장 축인 유통업도 침체다. 편의점 사업 경쟁은 심화했고, 전통 유통업도 힘을 쓰지 못하면서 GS리테일의 실적은 답답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GS건설 역시 건설업 장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정유와 유통, 건설 등 주력 사업의 부진을 만회할 수 있는 신성장동력 발굴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 GS글로벌·GS E&R·휴젤 인수 진두지휘… 다만 "GS는 M&A에 보수적" 평가
그동안 GS그룹이 신성장동력 발굴에 나서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홍 부회장은 지주사의 CFO로서 ㈜쌍용을 인수해 GS글로벌로 사명을 변경(2009년 7월)하고, STX에너지를 인수해 GS E&R로 사명을 변경(2014년 2월)하는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GS글로벌은 종합무역상사, GS E&R은 집단에너지 사업과 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발전 기업이다.
또한 홍 부회장은 지주사의 대표이사가 된 이후인 2021년 8월, ㈜GS가 보톡스 전문기업 휴젤 지분을 인수하며 바이오 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당시 ㈜GS는 IMM인베스트먼트, 아랍에미리트(UAE) 국부펀드 무바달라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휴젤 지분 47%를 인수했다.
하지만 GS그룹의 체질이 바뀌기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평가다. GS그룹은 휴젤 인수를 통해 바이오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점찍었음을 보여준 이후인 2022년 11월, 치과용 구강 스캐너 기업 메디트 인수전에서 물러섰다. 일각에선 GS그룹 특유의 '보수적', 또는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기업 문화가 또다시 작동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GS그룹이 그동안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보여준 것은 공격보다 방어, 도전보다 안정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우조선해양 인수 중도 포기다. GS그룹은 2008년 10월 포스코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시도했으나, 입찰 직전 포기를 선언했다. GS그룹은 같은 해 대한통운 인수전에서도 중도 하차했다. 2019년엔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을 위해 자문단을 선정했으나, 최종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다.
홍 부회장은 GS그룹 창립 20주년 사사(社史) 편찬 기념 인터뷰에서 "GS그룹에는 주주가 많아 장단점이 있다. 주주들이 충분한 토론을 거쳐 책임 있는 의사결정을 하다 보니 모든 사업을 신중하게 진행하고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며 "다만 의사결정이 신중하다 보니 기회를 놓치기도 하는데, 나중에 보면 이런 의사결정으로 어려움을 피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GS의 주요 사업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변화가 많지 않다"며 "구성원들도 상대적으로 내실과 안정을 지향하는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 "홍 부회장, 허 회장이 설계하는 미래의 컨트롤타워…재무 건전성 확보"
GS그룹은 허 회장 취임과 동시에 홍 부회장이 지주사 대표가 된 이후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한 방향을 틀었다. 그 중심에 투자회사 GS퓨처스와 GS비욘드, 벤처캐피털 GS벤처스가 있다. 올해 3월 기준 GS퓨처스는 100개, GS벤처스는 40개의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홍 부회장은 허 회장이 벤처 투자, 인공지능(AI)을 통해 GS그룹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예산 집행과 조직 개편, 리스크 관리를 맡고 있다. 대표적인 성과는 홍 부회장 체제에서 GS그룹의 재무 건전성이 개선됐다는 점이다. 2022년 말 기준 GS그룹의 연결 기준 부채비율은 105.7%였으나, 2023년 말 95.4%, 2024년 말 89.8%, 2025년 말 86.03%로 점차 줄고 있다.
GS그룹 관계자는 "허 회장이 그룹의 미래를 설계하는 설계자라면 홍 부회장은 그 설계를 현실로 구현해 내는 살림꾼"이라며 "홍 부회장 체제에서 GS그룹은 재무 구조를 한층 견고하게 다지며 언제든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한 재무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어 "홍 부회장은 재무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혁신에 필요한 자원이 적재적소에 배분될 수 있도록 정교한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덧붙였다.
홍 부회장은 사사 편찬 기념 인터뷰에서 "허 회장이 취임하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벤처 투자도 많이 하고 디지털 사업과 친환경 분야 사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며 "지금은 진행 과정이라 외부에서 보기에는 뚜렷한 성과를 찾기 어렵지만, 모든 사업이 가시화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앞으로 몇 년 이내에 달라진 그룹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