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사태로 치솟는 기름값을 잡기 위해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한 가운데 정유사가 현물 대리점에 팔던 물량을 크게 줄이면서, 평소 현물 대리점에서 저렴하게 기름을 받아 팔던 자가 상표 주유소와 일부 자영 주유소가 직격탄을 맞았다. 현물 대리점은 여러 정유사가 파는 물량 중 당일 가장 싼 기름을 대량으로 떼어다가 파는 도매상이다.

자가 상표 주유소는 일명 '무폴(無pole) 주유소'로, 특정 대형 정유사의 브랜드를 달지 않고 여러 도매상 중 당일 제일 저렴한 곳에서 기름을 받아 자체 상표로 판매하는 곳을 뜻한다. 각 정유사가 자체 브랜드 주유소에만 물량을 제한적으로 보내면서 현물 대리점에 의존하던 소규모 주유소들의 고심이 커지고 있다.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첫 주말을 맞은 15일 서울 서초구 만남의광장 주유소에서 시민들이 주유를 하고 있다./뉴스1

17일 주유소 업계에 따르면 일부 주유소는 정유 4사(SK에너지·S-Oil·HD현대오일뱅크·GS칼텍스)에서 평소 월별 사용량의 110~120%까지 주문할 수 있도록 주문 한도를 공지받았다고 한다.

이는 사재기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원래 주문량보다 10~15%포인트(P) 더 살 수 있도록 한 만큼 최고 가격제 시행 이후에도 정유사에 기름을 주문하면, 주유소에 원활하게 공급되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와 달리 현물 대리점들은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 난항을 겪고 있다. 정유사들은 유가가 급등하거나 기름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 현물 대리점에 판매하는 물량부터 줄인다. 직영 주유소, 공급 계약을 맺은 자영 주유소에 먼저 기름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사 브랜드 주유소에 파는 게 수익성 측면에서도 낫다. 정유사 입장에서 현물 대리점에 파는 건 기름을 대량으로 저렴하게 넘기는 것과 같다.

현물 대리점이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니 무폴 주유소는 물론 현물 대리점으로부터 일부 물량을 받던 자영 주유소들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 특정 브랜드와 계약한 자영 주유소도 일부는 현물 대리점에서 받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름을 섞어 쓰는 '혼합 판매'는 과거엔 불법이었으나, 지난 2012년 정부의 '석유 제품 시장 개선 방안' 시행 이후 합법이다. 대신 '혼합 판매 주유소'라는 안내문을 붙여야 한다.

한 주유소 운영자는 "직영, 알뜰 주유소와 가격 경쟁을 하려면 현물 대리점에서도 기름을 떼올 수밖에 없다"며 "정유사 물량을 80%, 현물 대리점 물량을 20% 정도로 섞어 탱크를 채웠는데, 최근엔 현물 대리점에서 주문을 아예 받지 않고 있어 물량 부족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현물 대리점 물량이 끊긴 가운데 정유사에 추가 주문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정유사들이 주유소가 평소에 주문하던 물량을 기준으로 쿼터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주유소 보유분 중 현물 대리점 비중이 크다면, 그만큼 공백이 생기는 상황이다.

다른 주유소 운영자는 "(정유사의) 지사에서는 평소에 사던 만큼 물량을 준다고 했다"며 "현물 대리점에서 저렴하게 받던 물량만큼 탱크가 비는데 채울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정유업계에선 현물 대리점이 브랜드 주유소에 기름을 파는 왜곡된 유통 구조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무폴, 알뜰 주유소가 생긴 후 석유 제품 유통 구조가 매우 복잡해졌고, 현물 대리점이 브랜드 주유소에도 기름을 팔기 시작했다"며 "기름 공급이 어려울 땐 계약 관계에 있는 자사 브랜드 주유소 중심으로 관리하는 걸 원칙으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재정경제부가 시행한 '석유제품 매점매석행위 금지 등에 관한 고시'에 따르면, 정유사는 올해 3~4월 석유 제품 반출량을 지난해 같은 달 대비 90%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 정당한 사유 없이 판매를 기피하거나 특정 업체에 과다 반출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주유소는 폭리를 목적으로 석유 제품을 과다하게 구입·보유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