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50대 박 모씨는 지난 5일부터 입구에 '오늘은 쉬는 날'이라 적힌 안내판을 세워두고 일주일째 장사를 쉬고 있다. 중동 사태 이후 정유사가 기름 가격을 한번에 100원, 200원씩 올리자, 주유소 저장고에 비싸게 새 기름을 채우는 대신 차라리 잠시 문을 닫기로 했다.
그는 "근처에 있는 알뜰·직영 주유소 시세를 고려해 판매 가격을 정하기 때문에 가격을 그대로 올릴 수가 없다"며 "비싸게 사서 최저가에 파느니 운영을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충남 태안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40대 김 모씨는 지난 7일 가격표에서 등유를 뺐다. 등유는 주로 시골에서 난방용으로 쓰이는데, 이달부터 정유사 공급 가격이 2000원대로 뛰었다. 이 가격에 받아 팔면 동네 손님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거라 생각했다.
등유를 뺀 다음 날, 결국 주유소 입구에 '현시점, 정유사 공급가가 판매가를 훨씬 추월하여 임시 휴무합니다. 불편드려 죄송합니다'는 안내판을 세우고 임시 휴업을 결정했다.
경북 영주에 있는 한 주유소는 최근 운영 시간을 단축했다. 기존 운영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였으나, 지난 주말부터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로 세 시간 줄었다.
주유소 사장인 박 모씨(50대)는 "기름 값을 올리지 않았더니 뜨내기 손님들이 몰려 '다른 데는 1900원인데, 여긴 아직 1700원이냐'며 기름을 가득 채우고 떠났다"며 "탱크가 떨어지면 비싸게 사와야 하니, 물량 방어 차원에서 운영 시간을 줄이고 단골 중심으로 장사한다"고 말했다.
◇주유소 "얼마에 받는지 몰라"… '월평균 사후 정산'의 함정
13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중동 사태 이후 국내 휘발유, 경유 가격이 급등하자 일부 주유소들은 임시 휴업에 돌입하거나 운영 시간을 줄였다. 대부분 시외 지역에서 개인이 대리점에서 기름을 받아 운영하는 자영 주유소였다. 주유소가 소비자 상대로 폭리를 취하는 게 아니냔 의혹이 나오는 것과 달리 이들은 '장사할수록 손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유사가 휘발유, 경유 공급 가격을 올리더라도 구조상 바로 반영하기가 어려워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입을 모았다. 보통 자영 주유소 사장은 주변 시세를 살펴보고, 당일 판매 가격을 정한다. 자영 주유소보다 저렴하게 기름을 공급받는 알뜰·직영 주유소가 주변에 있다면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가격 경쟁이 벌어진다.
정유사에서 석유 제품을 얼마에 받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점도 판매 가격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정유사와 주유소 간 계약 중에는 먼저 기름을 받고, 나중에 가격을 정산하는 '사후 정산 제도'가 존재한다. 주유소는 매입 시점에 정유사가 잠정적으로 정한 가격(잠정 매입 원가)으로 기름값을 먼저 지불하고, 한 달 후에 확정 가격으로 재정산하는 방식이다. 이를 월평균 사후 정산이라 부른다.
기름 저장 탱크가 작고, 물량이 빨리 소진되며, 현금 흐름이 안 좋은 주유소일수록 월평균 사후 정산 제도를 활용한다. 한 달 후 정유사가 청구할 금액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장 주먹구구식으로 가격을 정하는 셈이다. 특히 유가 급등기에는 평균 공급 가격이 매일 오르기에 사후 정산 때 추가 금액을 청구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 주유소 운영자는 "월평균 가격으로 사후 정산하는 주유소들은 기름을 받고 한 달 뒤에 뒤통수를 맞는다"며 "매입 가격을 알 수 없어 주유소는 역마진이 날 수도 있는데, 정유사는 절대로 손해보지 않는 불공정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토로했다.
정유업계는 가격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사후 정산 제도를 도입했다고 설명한다. 원유 가격과 석유 제품 가격이 매일 바뀌는데, 일정 기간 평균 가격을 산출해 정산하면 변동성을 줄일 수 있다. 유가 하락기엔 주유소가 사후 정산에서 환급을 받는다. 현금이 아닌 포인트로 받으며, 다음 구매에 쓸 수 있다고 한다.
◇'석유 최고 가격제' 시행… 공급가는 내렸지만 '재고 손실'은 주유소 몫
한편 이날부터 정부가 석유 최고 가격제를 시행하면서 정유사 공급 가격이 소폭 내려갔다. 제품별 최고가는 보통휘발유가 리터당 1724원, 자동차용 경유 1713원, 실내 등유 1320원이다. 도서 지역에 공급되는 석유 제품의 최고액은 보통휘발유 1743원, 자동차용 경유 1732원, 실내 등유 1339원이다.
주유소 판매 가격은 경영 자율성 등을 이유로 최고 가격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주유소 업계에서는 공급 가격이 공개되면서 손님들로부터 '주유소가 비싸게 판다'는 소리를 안 듣게 됐다고 반응이 나온다. 일각에선 최고 가격제 시행 전 정유사에서 비싸게 사 온 물량에 대해 알아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불만도 있다.
이날 대한석유협회, 한국석유유통협회, 한국주유소협회 등 석유 3단체는 성명문을 통해 "중동 정세 악화로 급등하고 있는 국제 유가가 국내 주유소 가격에 급격하게 반영되지 않도록 적극 협조하겠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