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200만 배럴가량을 실어 나르는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수요가 전례 없이 폭증하면서, 당장 바다에 띄울 수 있는 중고 선박이 새로 짓는 뱃값을 추월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노후 선박 증가와 대 러시아 제재 여파로 가용 선박이 이미 턱없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이란 전쟁이 운임 폭등에 불을 붙이며 VLCC 확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9일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 업체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선주들은 올 1~2월에만 VLCC 47척을 발주했다. 단 한 건도 주문하지 않은 작년 동기와 비교하면 시장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신규 발주를 해도 실제 선박을 인도받기까지는 통상 2~3년이 걸려, 당장 운항에 투입할 수 있는 배를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이 치열하다. 기존 VLCC 건조 계약을 웃돈을 주고 넘겨받는 리세일 가격은 1억6800만달러(약 2500억원)로 신조선가(1억2900만달러·약 1900억원)보다 3900만달러(약 580억원) 비싸다.
15년 된 노후 VLCC 역시 연초 대비 29% 상승한 8000만달러(약 1200억원)를 호가한다. 당장 배를 투입해 막대한 운임을 챙기려는 선주들이 수백억원의 프리미엄을 지불하고 나선 것이다.
클락슨리서치는 "제재로 묶인 선박과 장기 계약 물량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 VLCC는 전 세계 500척 미만인데, 그마저도 60~70%가 노후화한 상태"라며 "여기에 전쟁으로 운임이 폭등하며 VLCC 확보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말했다.
◇중동 전운에 빈 배 싹쓸이까지… 용선료 신고가
구조적인 공급 부족에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덮치면서 해상 물류 병목 현상은 극에 달했다. 호르무즈 해협 일대 무력 충돌이 격화해 선주들이 잇따라 통항을 중단하면서, VLCC 70여척을 포함해 100척이 넘는 유조선의 발이 묶였다.
여기에 흑해와 지중해에서 러시아 유조선 연쇄 피격까지 더해지며 화주들은 미국 걸프만 등 원거리 대체 산유국으로 눈을 돌렸다. 항만 적체에 운항 거리(톤마일) 증가까지 가중돼 시장에서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가용 선박은 사실상 씨가 말랐다.
중동 전쟁 사태 이전부터 심화한 공급난에 이번 전쟁이 기름을 부은 격이다. VLCC 시장은 그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 제재를 피해 러시아 원유를 실어 나르는 '섀도 플릿(그림자 선대)'에 중고 유조선들이 투입되면서 공급망이 쪼그라든 데다, 노후 선박들의 교체 시기까지 맞물려 만성적인 품귀 현상을 앓고 있었다.
국내 선사인 장금상선의 공격적인 선대 운영도 선박 품귀를 부추긴 요인으로 꼽힌다. 해운 분석업체 시그널오션 등에 따르면, 장금상선은 이번 운임 급등 사태가 본격화하기 전 향후 30일 내 미국 걸프만에서 출발해 아시아 등으로 향하는 미계약 빈 배(공선) VLCC 물량을 모두 선점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장금상선은 VLCC가 저평가됐다고 판단해 2022년부터 최근까지 중고선을 수십대 사들이며 선대를 확충해왔다. 지정학적 위기로 다른 선사들의 가용 VLCC가 급감하자, 장금상선이 미 선적지의 공급망을 독점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극심한 공급난은 곧바로 용선료 폭등으로 이어졌다. 평소 3만~4만달러(약 4500만~6000만원) 수준이던 VLCC 하루 운임은 이달 들어 10배가량 치솟았다. 지난 6일 기준 그리스 선사가 소유한 VLCC의 일일 운임은 53만7913달러(약 8억원)로 신고가를 경신했다고 해운 전문매체 트레이드윈즈는 전했다.
현대오일뱅크 역시 미국 걸프만 물량 확보를 위해 트라피구라 소유 선박을 하루 28만9000달러(약 4억3000만원)에 빌린 것으로 알려졌다. 선박 운용 수익성이 크게 높아지자 선주들이 앞다퉈 선박 확보에 나서면서 VLCC 수요를 더 끌어올렸다.
◇VLCC 수주 휩쓰는 中… 韓 조선사는 선가 상승 지렛대로 반사이익 기대
쏟아지는 VLCC 신규 발주 물량의 상당수는 중국 조선소로 향하고 있다. 조디악 마리타임, 판테온 탱커스 등 글로벌 대형 선주들은 최근 중고선가 상승을 활용해 노후 VLCC를 비싼 값에 매각한 뒤 그 자금으로 단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건조 공간이 여유 있는 중국 조선소에 교체 발주를 넣고 있다.
다만 VLCC를 비롯한 탱커(원유·석유 제품 운반선) 선가가 연일 고공 행진하는 흐름은 한국 조선사들에도 호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 조선소의 도크가 빠르게 채워지며 전 세계적인 선가 상승을 견인하고 있는 만큼, 한국 조선사들 역시 이를 지렛대 삼아 고수익 물량만 골라 담는 선별 수주 전략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강경태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선박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탱커 신조선가는 역사적 고점을 넘어설 수 있다"며 "현재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VLCC(약 30만t급)는 1억6200만달러(약 2400억원), 수에즈막스(약 15만t급 유조선)는 1억달러(약 1500억원), 아프라막스(약 10만t급 유조선)는 8250만달러(약 1200억원) 이상으로 오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한국 조선사들이 2029년 납기부터 전략적으로 탱커에 많은 슬롯(건조 공간)을 할애할 것으로 보이며 수주 단가도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은창 산업연구원(KIET) 연구위원은 "중국 주요 조선소들이 이미 2030년 인도분까지 물량을 채우고 있어 당분간 신조선가는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며 "결국 빠른 인도가 필요한 선주들은 가격이 다소 높더라도 납기 경쟁력이 있는 한국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데다 전장 장기화 시 예상치를 상회하는 추가 수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