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발 공급 과잉과 수요 부진이라는 구조적 불황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율적 사업 재편에 나선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국제 유가 급등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석유화학 기업은 국제 유가 급등 시 원가 부담이 커지고, 수요가 위축되는 이중고를 겪는다. 특히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주로 원유에서 뽑아낸 나프타를 원료로 쓰는 나프타 분해 설비(NCC) 공정을 활용해 유가 변동에 매우 취약한 구조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이란이 전략적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면서 국제 유가가 급등하고 있다. 3일(현지 시각) 서부 텍사스유(WTI)는 전일 대비 6.28% 치솟아 배럴당 71.23달러로 마감했다. 이어 두바이유, 브렌트유도 6%대 상승해 각각 76달러, 77달러 선에서 거래를 마쳤다. 스위스계 투자은행 UBS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브렌트유가 120달러를 웃돌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약 25%가 통과하는 핵심 수송로다.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UAE)·이란 등 주요 산유국의 수출 물량 대부분이 이 수로를 통해 아시아·유럽·미국으로 향한다. 공습 직후 이란 반관영 매체는 해협이 사실상 폐쇄된 상태라고 보도했다. 실제 민간 선박에 대한 공격 사례가 보고되면서 선사들의 통행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 운항 차질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당장 원가 부담이 늘어나는 걸 우려한다.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가격은 유가와 동행한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 나프타 가격도 뛰는 구조다. 기업이 원가 인상분을 플라스틱, 섬유 원료 등 최종 제품 가격에 바로 반영하지 못하면 수익성이 나빠진다.
문제는 중국의 대규모 석유화학 설비 증설로 에틸렌 등 기초 유분 공급 과잉이 심화하면서 원가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전가하는 게 어렵다는 점이다. 석유화학 제품의 수익 지표는 제품 가격에서 원료비를 뺀 스프레드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미 손실 구간이다. 보통 에틸렌 스프레드의 손익분기점은 250~300달러인데, 최근엔 100달러 이하에서 가격이 형성됐다.
지난해 주요 석유화학 기업의 영업손실 총합은 약 1조5000억원에 달했다. 이진호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최근 에틸렌 스프레드가 100달러 이하로 하락해 실적 악화 우려가 큰 상황"이라며 "이번 사태로 국내 석유화학 기업의 실적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제품 수요도 악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고유가로 인해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자동차, 가전, 건설 등 전방 산업에서 화학 제품 수요가 줄어든다. 원료 투입 시점과 제품 판매 시점의 시차도 변수다. 유가가 급등하는 시기에는 비싸게 산 원료로 만든 제품을 제값에 팔지 못해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이 사용하는 NCC 공정은 유가 변동에 더욱 취약하다. NCC 운영 비용에서 원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보통 70~80%다. 이와 달리 미국, 중동에서는 가격 변동이 거의 없는 에탄을 원료로 쓰는 에탄 분해 공정(ECC)을 활용한다.
운송비도 부담 요소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에틸렌·프로필렌 등 6개 기초 유분의 전체 생산량 중 29%가 수출됐다. 지정학적 리스크로 운송비가 오르면 수출 비중이 높은 석유화학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 선박 연료비도 즉각 오른다.
사업 재편을 진행 중인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유가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아직 기존에 보유한 나프타 재고가 있어 단기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나프타 가격이 오를 것으로 보고 대응 전략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 유가가 급등하더라도 구조 개편은 성실히 추진돼야 한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입장"이라고 부연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달 25일 사업 재편 '1호 프로젝트'인 대산 석유화학 산업 단지에 2조원 규모의 금융 지원과 1000억원 안팎의 원가 절감 혜택을 제공하는 계획안을 승인했다. 이른 시일 내 여수, 울산 단지에 대해서도 사업 재편을 승인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