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압 변압기 시장의 호황으로 실적이 개선되고 있는 국내 전력기기 제조사들이 최근 배전 기기 사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배전 기기는 송전 시설에 비해 교체 주기가 짧고 시장 규모가 큰 만큼 수요도 늘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7일 전력기기 업계에 따르면 HD현대일렉트릭(267260)은 최근 충북 청주에 완공한 중저압 차단기 공장 인근에 배전 기기 전용 캠퍼스를 조성하기로 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울산에 배전반(전기를 안정적으로 분배하는 장치)과 배전 변압기 공장을 가동 중인데, 이 시설을 청주로 재배치하고 규모를 키우려는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다.
HD현대일렉트릭의 매출은 초고압 변압기에 집중돼 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전체 매출의 59.1%를 초고압 변압기 부문이 담당했다. 배전반, 배전 변압기, 중저압 차단기 등 배전 기기는 17.6% 수준에 그쳤다. 같은 시기 초고압 변압기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87.7%의 성장세를 보였지만, 배전 기기 매출은 고작 0.1% 성장했다.
HD현대일렉트릭이 배전 기기 생산 시설을 재배치하고 규모를 확대하려는 것은 초고압 변압기 수요가 꺾이는 시기를 대비한 사업 구조 다변화 전략이다.
전력 사업은 발전(전력 생산)에서 송전(생산된 전력을 수요 지역까지 전송), 배전(전송된 전기를 기업·가정 등에 공급)으로 이어지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초고압 변압기는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장거리로 송전할 때 손실을 줄이는 데 쓰이는 전력 기기다. 송전 단계에서 쓰이는 기기는 사용 연한과 교체 주기가 20~30년으로 긴 편이다.
최근 초고압 변압기 시장이 호황을 맞은 것은 인공지능(AI) 시장의 팽창 등으로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급증한 데다, 송전 시설의 교체 주기가 도래하면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반면 배전 기기는 사용 연한이 상대적으로 짧고, 수요처도 더 많다. 이 때문에 HD현대일렉트릭을 비롯한 전력기기 업체들이 초고압 변압기 수요가 감소하기 전에 보다 안정적인 배전 기기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배전 기기 수요는 계속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LS일렉트릭은 북미 전력 시장이 노후 송전 인프라 교체로 인한 '초고압 호황'을 맞은 데 이어 앞으로 더 규모가 큰 '배전 호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북미 배전 시장 규모는 초고압 변압기 시장의 6배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배전 기기 강자 LS일렉트릭도 북미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3일부터 북미 최대 송배전 전시회에 참가해 UL 인증을 받은 배전반 제품과 데이터센터 맞춤형 직류 배전 시스템 등을 전시하며 본격적인 배전 제품 홍보에 나섰다. UL 인증은 북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다.
LS일렉트릭은 지난 20년 동안 배전 사업 부문에서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지난해 4분기 중저압 변압기 매출은 76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25% 늘었고 배전반과 배전 기기 매출도 각각 38%, 15% 증가했다.
LS일렉트릭 관계자는 "송전에 이어 배전 시장도 호황이 오는 구조"라면서 "북미·아세안·유럽이라는 전략 시장을 차세대 하이엔드 제품을 앞세워 배전 시장을 더 공략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효성중공업(298040)도 배전 분야를 유망 영역으로 보고 사업을 지속 확대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미국 전력망·친환경 등 프리미엄 시장을 중심으로 배전 사업을 전개한다. 또 높아지는 친환경 수요에 대응해 친환경 배전반 관련 연구·개발 및 제품 라인업을 지속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효성중공업은 국내 배전 유입변압기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비즈니스리서치인사이트에 따르면 전 세계 배전 기기 시장 규모는 2026년 1768억6000만달러(약 258조9900억원)에서 10년간 연평균 5.7%씩 성장해 2035년에는 2901억5000만달러(약 424조98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배전 기기 수요는 송전 수요와 비례해 늘어나는 구조라 현재 호황인 송전(초고압 변압기) 시장만큼 배전 시장도 커질 것"이라며 "매출이나 이익 규모 변동성이 상대적으로 작은 배전 기기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식 교보증권 연구원은 "배전 시장은 개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사업이기 때문에 기간 산업인 송전 시장보다 규모가 2~3배 크고 지속성도 높을 수밖에 없다"며 "LS일렉트릭은 주로 해외 시장 공략에, HD현대일렉트릭은 국내에서의 점유율 확대에 각각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