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에서 지난 15일 모처럼 박수가 터져 나왔다. LG AI연구원이 개발한 생성형 인공지능(AI) 모델 'K-엑사원'이 정부 주관 '독자 AI 파운데이션모델' 사업 1차 평가에서 벤치마크와 전문가 평가 모두 최고점을 기록하며 통과했기 때문이다. 런던증권거래소 등 국내외 기관·기업의 러브콜을 받아온 LG의 AI 모델이 공식 평가에서도 성능을 재차 입증한 것이다.
올해로 취임 9년 차를 맞은 구광모(48) LG그룹 회장은 최근 수년간 AI를 미래 먹거리의 핵심 축으로 점찍고 '선택과 집중'을 강조해 왔다. "경쟁의 룰과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만큼, 선택과 끈질긴 집중을 토대로 지금까지의 성공 방식을 뛰어넘는 혁신을 이뤄야 한다"는 메시지를 잇달아 전하며 투자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고 ABC(인공지능·바이오·클린테크) 분야를 중심으로 새 먹거리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 안팎에서는 구광모 회장의 '선택과 집중' 기조를 계열사 의사 결정으로 연결하는 핵심 고리로 권봉석(63) ㈜LG 최고운영책임자(COO·부회장)를 꼽는다. 권 부회장은 2022년부터 '그룹의 2인자'로 불리는 ㈜LG COO를 맡아 구 회장과 함께 그룹의 미래 먹거리 발굴과 투자 과제를 총괄하고 있다.
구 회장 취임 당시 6명에 달했던 부회장단은 권봉석 부회장 한 명이 보좌하는 구조로 정리되며 핵심 의사 결정 라인이 간결해졌다. 재계 한 관계자는 "권 부회장은 계열사 최고경영진과 수시로 소통하며 그룹의 방향과 투자 우선순위를 맞추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살림을 챙기면서 운영 효율과 미래 과제를 둘러싼 의사 결정의 기준을 잡아준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역할은 구 회장과의 인연에서도 읽힌다. 지난 2014년 권 부회장이 ㈜LG 시너지팀장(전무)을 맡던 시절, 구 회장은 LG전자 경남 창원 사업장에서 현장 경영 수업을 받은 후 권 부회장이 이끄는 팀의 부장으로 합류했다.
지금은 사라진 시너지팀은 LG전자·LG디스플레이·LG화학 등 계열사의 협업 과제를 전담하던 핵심 조직이다. 그룹 전반의 속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룹의 설계도면' 같은 부서로 꼽혔다. 권 부회장은 직속 상사로서 구 회장에게 계열사 간 이해관계와 사업 흐름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선택과 집중'으로 사업 체질 바꾼 39년 차 LG맨
권 부회장은 1987년 금성사(현 LG전자)에 입사해 TV·모니터·모바일 등 핵심 사업을 두루 거친 '정통 LG맨'이다.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핀란드 알토대에서 경영전문대학원(MBA) 석사 과정을 밟았다. 2007년에는 부장 직급으로는 이례적으로 신설 조직인 모니터사업부 수장이 됐다. 당시 업계 최소 두께의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 등 혁신 제품을 출시하며 글로벌 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권 부회장과 LG전자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그가 굵직한 의사 결정의 갈림길마다 '선택과 집중' 원칙을 앞세웠다고 전했다. 돈이 안 되는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미래 성장 동력에 빠르게 투자를 늘리는 방식이다. TV 사업을 총괄하던 2017년, 차세대 제품으로 주목받던 '커브드(휘어진) TV' 사업을 접은 결정이 대표적이다.
당시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커브드 TV에 경쟁적으로 투자를 늘리던 시기였지만, TV는 여전히 가족이 거실에 모여 함께 보는 가전이었고 휘어진 화면이 오히려 불편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권 부회장은 이를 근거로 신제품 라인업에서 커브드 TV를 제외하며 개발을 사실상 중단했다.
TV 제품군을 잇달아 정예화하면서 고정비 부담이 낮아지고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 TV 사업부 영업이익률이 8%를 넘기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시점도 이 무렵이다.
TV 하드웨어 경쟁만으로는 수익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본 그는 스마트 TV 플랫폼 '웹OS'를 도입하며 소프트웨어 사업을 키웠다. 여기에 맞춤형 광고 등 서비스 모델을 얹어 TV에서 나오는 수익원의 폭을 넓혔다. 갈수록 TV 수요가 쪼그라드는 가운데 웹OS 플랫폼 사업은 LG전자의 알짜 사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매출은 2년 전 1조원을 넘어섰고, 영업이익률은 두 자릿수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TV를 넘어 모니터, 모빌리티까지 웹OS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입사 32년 만에 LG전자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뒤에는 다음 먹거리로 전장(자동차 전자 부품) 사업에 집중했다. 2021년 세계 3위 자동차 부품 업체 마그나 인터내셔널과 전기차 파워트레인 합작 법인 'LG마그나 이파워트레인'을 설립하며 포트폴리오 전환에 속도를 냈다. 체질 개선이 이어지면서 LG전자는 2021년 창립 이후 사상 최고 실적을 냈다.
그는 같은 해 장기 적자를 내던 스마트폰 사업을 정리했다. 오랜 기간 키웠던 사업인 만큼 내부에서도 아쉽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철수를 미뤘다면 코로나19 사태 이후 수요가 급감하는 시기에 회사 전체가 흔들렸을 수 있다는 평가가 현재로서는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사업 철수와 관련해 뒷말이 적었던 것도 권 부회장의 능력으로 꼽힌다. 재계 관계자는 "모바일 사업을 맡던 3400여 명을 재배치했고, 협력사를 비롯해 LG 스마트폰 생태계에 있던 기업들과 원만하게 사업을 마무리했다"며 "그 규모를 볼 때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조롭게 정리된 것은 권 부회장의 공이 컸다"고 말했다.
◇ 사업 위기 때마다 회자된 '직접 소통' 리더십
스마트폰 철수 국면에서 권 부회장의 '직접 소통'은 업계에서도 회자됐다. MC(모바일)사업본부 매각설이 돌자 그는 이메일을 통해 "사업 운영의 방향이 어떻게 정해지더라도 원칙적으로 고용은 유지되니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며 직원들을 진정시켰다.
사업 종료가 확정되자 그는 다시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오랜 고심 끝에 매우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됐다. MC사업본부 구성원들에게 이번 결정이 어떤 의미일지를 생각하면 CEO로서 너무나 애석하고 무거운 마음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한 결단이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코로나19로 대면 접촉이 어려워진 시기에는 'CEO 일기로 전하는 신년 메시지'라는 제목의 메일을 직원들에게 보냈다. 리더로서의 자성과 다짐을 일기 형식으로 솔직하게 풀어낸 글을 여전히 기억하는 구성원이 적지 않다고 한다.
권 부회장과 한솥밥을 먹었던 한 직원은 "메시지를 항상 직접 기획해 전했고, 발표 자료도 스스로 정리해 별도의 원고 없이 핵심을 짚어갔다"며 "보고를 받을 때도 실무자 의견을 중시하고 의전을 지양하는 철저한 실용주의 리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권 부회장이 임직원들과 직접 소통하는 시간을 종종 마련하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기탄없이 유머러스하게 풀어내 집중도가 높다"며 "집무실에 책을 쌓아두고 읽고, 직원들과 소통할 때도 인상 깊은 책 내용이나 영화, 음악 등을 끌어와 인사이트를 전해준다"고 말했다.
◇ 주력 사업 흔들리는 LG… 미래 사업 전환 속도전
COO 5년 차에 들어선 권 부회장은 구 회장이 그린 밑그림을 계열사별 실행 과제로 풀어내는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AI 연구원의 기술을 전자·배터리·통신·서비스 사업에 어떻게 얹을지 우선순위를 세우고, 계열사별 이해관계를 맞추며 '선택과 집중' 기조가 현장에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식이다.
그는 LG전자·LG화학·LG에너지솔루션·LG유플러스 등 핵심 계열사 이사회에도 참여하며 주요 사업 방향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경영진을 만나 전장 협업 논의를 이어가는 동시에 메타 등 빅테크와 영상 기반 시스템온칩(SoC) 설계 협력 등도 물밑에서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권 부회장 앞에 놓인 과제가 적지 않다. 과거 LG의 실적을 떠받치던 주력 사업들이 경쟁 심화와 수요 위축으로 동시에 흔들리면서, 미래 성장축을 제때 키우지 못하면 전환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LG전자는 중국 업체 공세로 TV와 가전 수익성이 악화하며 지난해 4분기 연결 기준 9년 만에 적자를 냈다.
LG에너지솔루션도 전기차 수요 정체로 업황 둔화가 이어지고 있다. LG화학은 석유화학 부문 부진 속에 구조조정과 포트폴리오 전환 압박이 커졌고, LG디스플레이·LG생활건강 역시 중국 업체들과의 경쟁이 거세지면서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지금 LG의 과제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수준을 넘어, 계열사별로 흩뿌려진 투자를 그룹 전체의 큰 방향으로 묶어 속도감 있게 끌어올리는 것"이라며 "AI를 포함한 신사업 전환의 시너지를 성과로 바꿔내는 속도가 승부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