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석유화학 업계 간담회에 모인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석유화학 기업 12사 최고경영자는 나란히 서서 주먹을 쥐고 함께 "파이팅!"을 외쳤다. 지난해 8월 정부 주도로 석유화학 산업 구조 조정을 논의한 지 4개월 만에 대산·울산·여수 산업단지 기업들이 설비 폐쇄, 통폐합 시나리오를 담은 사업 재편안을 모두 제출하자, 서로 독려하는 의미였다.

정부는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공급 과잉, 수요 침체라는 구조적 불황에 빠져 있어 근본적으로 체질 개선을 하지 않는다면 공멸할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50년 간 이어진 한국 석유화학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생산량의 30%를 줄이는 구조 조정을 결정했다. 김 장관은 당시 간담회를 마친 후 "멀쩡한 석유화학 기업들이 서로의 미래를 살리기 위해 큰 결단을 내렸다"고 격려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석유화학업계 사업 재편 CEO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뉴스1

◇ 내년까지 중국發 공급 과잉… 최신 설비 갖춘 중동 산유국도 가세

내년까지 전 세계 석유화학 제품 생산량은 계속 늘어날 예정이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S&P 글로벌은 올해 전 세계 에틸렌 생산능력이 2억4200만톤으로 전년 대비 801만톤(3.4%) 늘어나고, 내년에는 2억5300만톤으로 1050만톤(4.3%)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 에틸렌은 석유 유분을 정제해 얻는 기본 화학 물질이다. '산업의 쌀'로 불리며 플라스틱, 비닐, 섬유 등 거의 모든 화학 제품의 원료가 된다.

그간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제품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중국에 수출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2010년대부터 중국 석유화학 업계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저렴한 인건비 등을 앞세워 자급률을 높이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중국이 석유화학 제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면서 최대 수출 시장을 잃은 셈이다. 한국화학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석유화학 제품 수출에서 대(對)중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47.8%에서 2024년 36.9%로 줄었다.

제품 수요보다 생산량이 더 많아지면서 국내 기업들은 공장을 돌릴수록 손해를 보는 형국이다. 올해 상반기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의 평균 매출 원가율은 98.6%까지 올라 수익성이 '0'에 가까웠다. 평균 매출원가율은 2021년 87.6%, 2022년 92.3%, 2023년 93.8% 등으로 꾸준히 상승세다.

석유화학 기업의 수익성을 좌우하는 핵심 지표인 에틸렌-납사 스프레드(원재료와 최종 제품의 가격 차)는 2022년부터 4년째 톤당 200달러 초반에서 움직이고 있다. 손익분기점인 250~300달러를 크게 밑도는 수치다.

중국은 내년까지 석유화학 설비를 계속 증설할 예정이다. 올해 중국의 에틸렌 생산량은 전년 대비 9.1% 증가한 6354만톤, 내년엔 9.8% 늘어난 6976만톤으로 예상된다. 최영광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7월 중국 정부가 최근 과도한 생산 경쟁을 억제하겠다는 '반내권화(反内卷化)' 정책을 언급했지만, 설비가 눈에 띄게 축소되지는 않았다"며 "새로 증설되는 설비 규모가 커 에틸렌-납사 스프레드의 약세도 이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우디, 카타르, 쿠웨이트 등 중동 산유국들도 석유화학 설비를 늘리고 있다. 중동은 화학제품의 원료인 원유를 저렴하게 얻을 수 있어 수익성이 높다. IBK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2030년까지 중동 지역의 주요 프로젝트에서 연간 1123만톤의 에틸렌 생산 능력이 추가된다. 이는 한국의 전체 에틸렌 생산량과 맞먹는 규모다.

중동은 최신 기술인 COTC(Crude Oil To Chemical·원유에서 직접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통합 공정 방식) 공법을 활용한다. 기존 공법은 원유를 정제해 화학제품 원료인 나프타를 만들고, 다시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프로필렌 같은 기초유분을 생산한다. COTC는 이 같은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원유에서 바로 기초유분을 만드는 방식으로 생산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COTC는 원유에서 화학제품으로 바뀌는 전환율도 60~80%에 달한다. 올해 상반기 완공을 앞둔 에쓰오일 샤힌프로젝트에도 COTC 공법이 적용된다. 반면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기존 NCC 설비를 쓰고 있는데, 전환율이 10~20% 정도에 그치고 있다.

COTC 공법이 도입된 S-OIL(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 건설 현장. / 에쓰오일 제공

◇ 美·日 등 생산 줄여도 역부족… 러·우 전쟁 종전 여부는 변수

올해도 에틸렌 등 석유화학 제품 수요에 비해 중국, 중동 등의 증설로 공급되는 물량이 훨씬 많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충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에틸렌 수요는 전년 대비 600만t(톤)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며 "중국, 인도 등에서 예정된 에틸렌 증설 규모만 900만톤에 달해 공급 과잉이 심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 이어 미국, 일본, 유럽에서도 석유화학 제품 생산량을 줄이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24년 연산 190만t 규모의 웨스트레이크 설비를 폐쇄했고, 일본 미쓰이·스미토모의 설비 통합(50만톤), 유럽 이네오스의 설비 폐쇄(45만톤) 등도 잇따랐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중국의 공급 과잉이 해소되지 않으면 업황이 반등하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노우호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중국, 중동이 석유화학 산업에 투자를 지속하는 상황이라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근본적인 기초체력이 살아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전우제 KB증권 연구원은 "각 국이 생산량을 줄이고 있으나, 순공급 증가분을 간신히 상쇄하는 수준"이라며 "2028년까지 현재 시황이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재료인 원유 가격이 내려도 수익 개선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최 연구원은 "유가가 하락할 때 석유화학 제품 가격도 같이 떨어져 스프레드가 개선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역래깅 효과(원료 투입과 제품 판매 시점 간 시차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 재고 평가 손실 등에 따라 석유화학 기업들의 실적 부진이 더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석유화학제품 생산 계통도. /삼일PWC경영연구원 자료 중 일부.

일각에서는 올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여부가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실적 향방을 가를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충재 연구원은 "지금은 일부 국가를 제외한 전 세계 석유화학 업체들이 수익성 악화로 공급량을 줄이고 있는 상황"이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시 국제유가가 더 떨어지면 국내 업체들의 원가 경쟁력이 높아져 실적이 크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