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배터리 업계가 새로운 수익원으로 꼽히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을 공략하고 있지만, 전기차 시장 침체에 따른 실적 부진을 만회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ESS 배터리는 전기차 배터리에 비해 공급 물량이 적은 데다, 이미 시장을 선점한 중국과의 가격 경쟁으로 인해 수익성도 기대에 못 미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5일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과거 완성차 업체들과 체결했던 공급 계약이 잇따라 해지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이 지속되면서 완성차 회사들이 전기차 전환 전략을 수정하고 다시 내연기관차에 대한 투자에 나섰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 미국 애리조나주 46시리즈 원통형 및 리튬인산철(LFP) 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 생산 공장 조감도./LG에너지솔루션 제공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12월 미국 완성차 기업 포드, 미국 배터리팩 제조사 FBPS와 맺은 전기차 배터리 관련 공급 계약이 해지됐다고 밝혔다. 해지된 계약의 규모는 각각 3조9000억원, 9조6000억원에 이른다. 포드는 전기 픽업트럭 생산을 중단하고, FBPS는 배터리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엘앤에프는 테슬라와 3조8347억원 규모 양극재를 공급하기로 계약했으나, 실제 들어간 물량은 973만원에 불과했다고 공시했다. SK온은 미국 포드와 만든 배터리 생산 합작법인 블루오벌SK를 해산하기로 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일본 혼다와 미국 오하이오주에 만든 배터리 합작 공장 토지, 건물 등을 혼다에 처분하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지난해 9월 전기차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세액공제를 종료하면서 전기차 시장의 수요는 계속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에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최근 전기차 배터리 대신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로 수요가 늘고 있는 ESS 배터리 생산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ESS 시장에서는 에너지 밀도는 낮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화재 위험성이 낮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채택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LFP 배터리 시장은 중국 배터리 제조사들이 주도하고 있고, 국내 업체들은 비싸고 품질이 좋은 삼원계(NCM) 배터리에 강점을 갖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블룸버그NEF(BNEF)는 오는 2027년 전 세계 ESS 시장에서 LFP 채택 비율이 94%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최근 ESS 배터리 시장 공략을 위해 LFP 배터리 기술 개발과 설비 전환에 집중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미시간 홀랜드 공장의 일부 라인을 ESS용으로 전환해 오는 6월부터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SK온도 올해 하반기부터 ESS 전용 LFP 배터리 양산에 돌입한다. 삼성SDI는 올 연말쯤 미국 내 ESS용 배터리 생산 능력을 연간 30기가와트시(GWh)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LFP 배터리가 탑재된 ESS 제품 'SBB(Samsung Battery Box) 2.0./삼성SDI 제공

그러나 업계에서는 ESS 배터리 시장 자체가 전기차 배터리 시장보다 작고, 계약이 연속적이지 않아 실적 개선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많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배터리는 새로운 모델이 나오는 시기에 맞춰 한번에 6년에서 10년씩 공급 계약을 맺지만, ESS 배터리 계약 기간은 데이터센터를 짓는 기간인 2년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데이터센터는 한 번 설치하면 끝인 일회성 계약이 대부분이며, 다음 수주도 보장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100GWh급 기가팩토리를 운영하는 국내 배터리 업체들에게 ESS 배터리 수주 규모는 미미한 수준이다. 최근 AI 시장이 커지면서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모량 역시 500MWh(메가와트시)~1GWh로 커졌지만, 100GWh 공장 입장에서 이는 전체 가동률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이충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세계 최대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BESS)의 단일 계약 규모는 3~4GWh 수준인데, 100GWh급 설비에서는 몇 개의 라인만 돌리면 되는 수준"이라며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이 ESS 시장을 통해 원가를 낮추고 수익을 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LFP 배터리 수주가 계속 늘어도 배터리 제조사들의 공장 가동률이 빠르게 상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SK온의 공장 가동률은 52%,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는 각각 51%, 44%에 그쳤다.

중국 배터리 기업과의 가격 경쟁도 부담이다. 중국은 전 세계 LFP 배터리 시장에서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미국 최대 ESS 사업자인 테슬라조차 메가팩에 들어가는 LFP 셀을 중국 CATL에서 대량으로 공급받는다.

다만 업계에서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관세 장벽을 높이면서, 국내 기업들의 미국 ESS 시장 점유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미국은 현재 중국산(産) ESS 배터리에 40.9%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세율을 58.4%로 올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