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미국에 의해 축출되면서, 베네수엘라산(産) 원유가 글로벌 시장에 풀릴 가능성이 커졌다. 베네수엘라 중질유의 공급 확대는 고도화 설비(중질유 분해 시설)를 갖춘 국내 정유업계에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 원유가 시장에 풀리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단기적 영향은 작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4일(현지 시각) AP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한 뒤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세계 최대 규모인 미국의 석유 회사들을 투입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무너진 베네수엘라의 석유 기반 시설을 복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양의 석유를 팔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1위 원유 매장국이지만, 점도가 높은 초(超)중질유의 비중이 커 원유를 생산하는데 많은 비용이 투입된다. 점도가 낮고 황과 금속 성분의 함유량이 적은 경질유는 원유를 가열할 때 휘발유, 항공유 등 비싼 기름이 많이 나오며 정제 과정도 비교적 단순하다. 반면 중질유는 아스팔트, 등유, 중유 등이 나오는 원유라 품질이 낮고 처리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한국이 가장 많은 원유를 수입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중질유의 매장 비중이 높은데, 베네수엘라 원유는 이보다 점도가 더 높고 황과 금속 성분 함유량도 많은 초중질유에 속한다. 초중질유는 물보다 무거워 물 안에서 가라앉는 특성이 있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SK에너지, 에쓰오일,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의 고도화율 평균은 지난 2023년 기준 30.4%였다. 원유 고도화율은 전체 원유 처리 능력에서 중질유를 재처리해 휘발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전환하는 설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뜻한다.
국내 정유사의 고도화율 평균치는 미국(56.5%), 영국(49.9%), 이탈리아(48.4%), 일본(35.7%)보다 낮지만, 중국(27.3%)·러시아(24.6%)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중질유를 수입해 고도화 설비로 경질유를 뽑아내는 기술력이 중국, 러시아 등보다 앞서 있다는 것이다.
중질유 처리 능력을 갖춘 국내 정유사들 입장에선 베네수엘라 원유가 낮은 가격에 대규모로 시장에 출하될 경우 원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윤재성 하나증권 연구원은 "미국 정유사들은 앞으로 저렴한 베네수엘라 원유를 조달해 원가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 경우 중동은 대미(對美) 수출을 줄이고 아시아에 대한 공급을 늘릴 수 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그는 "베네수엘라 원유도 들어온다면 아시아는 다양한 원유 조달 선택지를 갖게 된다"며 "장기적으로 국내 정유사들도 수혜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베네수엘라 원유가 시장에 풀리는 길이 열려도 국내 정유사들이 짧은 기간 안에 눈에 띄는 이득을 챙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 인프라는 사실상 붕괴된 상태라 미국 정유사들이 복구 인력을 투입해도 본격적인 증산까지 1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베네수엘라와 한국의 긴 운송 거리 역시 장애물로 꼽힌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거리를 반영한 운송비를 고려하면 국내 정유사는 중동산 원유를 수입하는 게 가장 저렴한 선택지"라며 "베네수엘라 입장에서도 아시아 국가들보다는 유럽에 원유를 파는 편이 경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