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가전, 건설 등 안 쓰이는 곳이 없어 실물 경제의 선행 지표 역할을 하는 구리. 이에 '닥터 코퍼(Dr. Copper·구리 박사)'로 불려 온 구리 가격이 업계 예상보다 가파르게 상승하며 연일 신고가를 쓰고 있습니다.
전방 수요 부진과 고금리 영향 등으로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는 여전한데 구리 시장은 펄펄 끓고 있는 것입니다. 구리가 더 이상 단순한 산업재가 아닌 AI(인공지능)와 에너지 안보의 핵심 자산이 되면서, '구리 가격이 오르면 경기가 좋고 내리면 나쁘다'는 지난 수십 년간의 공식이 깨지고 있습니다.
◇ 구리 표준 제련 수수료 0달러… 광산이 '슈퍼 갑' 됐다
29일(현지시각) 기준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거래된 구리 현물 가격은 톤(t)당 1만2306달러(약 1770만원)를 기록하며 지난 19일 이후 11일 연속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우고 있습니다. 19일은 칠레 구리 광산업체 안토파가스타와 중국 제련소들이 내년 벤치마크(시장 표준 가격) 제련 수수료를 톤당 0달러에 합의한 날입니다.
통상 제련소는 광산에서 구리 원석을 받아 불순물을 제거해 주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습니다. 이 수수료가 0원이 됐다는 건, 제련소들이 '공짜로 만들어 줄 테니 원석만이라도 공급해 달라'고 광산 업체에 사실상 백기 투항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례적인 이날 합의 이후 구리 가격은 약 5% 오르며 1만2000달러 선을 단숨에 뚫었습니다. 업계에서는 "내년 제련 표준 수수료를 0달러로 합의한 건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구리 공급 쇼크의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공급 부족은 물리적인 생산 차질 영향이 큽니다. 메리츠증권 분석에 따르면 올 하반기 인도네시아 그래스버그 광산 사고와 캐나다 혼 제련소 영구 폐쇄 등 대형 악재가 겹치며 구리 공급망이 붕괴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국제구리연구그룹(ICSG)은 "내년 구리 공급은 기존 예상보다 더 줄고, 수요는 더 늘면서 시장에선 약 15만톤 규모의 구조적 공급 부족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 가격 올라도 빅테크발 수요 견조… "비용보다 속도"
공급은 막혔는데 수요의 질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구리 가격이 오르면 지갑을 닫았던 과거 건설업 등 전통 산업과 달리, 현재 구리 시장을 주도하는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수요는 가격 급등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빅테크 기업엔 당장의 비용 부담보다 경쟁사보다 한발 앞서 인프라를 구축해 시장을 선점하는 속도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리 값이 올라도 빅테크들의 사업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장재혁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1GW(기가와트)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지을 때 구리 가격이 10% 급등한다 해도, 전체 프로젝트 비용에서 늘어나는 돈은 0.3%도 채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당장 가격을 불문하고 물량을 쓸어 담는 구조적 수요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업계에서는 지금과 같은 가격 상승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현재 광산 기업들이 신규 채굴에 나설 수 있는 마지노선인 '유인 가격'을 업계는 1만2000달러 이상으로 추정합니다. 가격이 이 밑으로 내려가면 채산성이 안 맞아 신규 공급이 늘어날 가능성이 적다는 뜻입니다. 설령 지금 당장 투자를 결정한다고 해도, 광산 발견 후 실제 생산까지는 평균 15.7년이 걸려 이른 시일 내 공급 부족이 해소되기는 어려운 구조입니다.
◇ 풍산은 '가격 차익' 챙기고, LS전선은 '매출 덩치' 키워
이런 '슈퍼 코퍼' 현상에 국내 관련 기업들도 웃고 있습니다. 방산과 구리 가공(신동) 사업을 함께 하는 풍산은 구리 가격이 상승하면 시세 차익(재고 평가 이익)을 봅니다. 쌀 때 사서 창고에 넣어둔 구리를 비싸진 현재 시세에 맞춰 제품가로 팔기 때문에 그 차액(메탈 게인)만큼 영업이익이 늘어납니다. 여기에 원자재 상승분을 판매 가격에 즉각 반영하는 판가 연동제가 더해져, 구리 가격이 오를수록 실적이 좋아집니다.
데이터센터 혈관인 전력 케이블을 만드는 LS전선은 구리 값이 오르면 매출 덩치가 커집니다. 전선업계는 통상 원자재 가격 변동분을 제품가에 반영하는 '에스컬레이터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구리 가격 상승분만큼 매출 규모가 커지면서 고정비 부담이 줄어드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보게 됩니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용 초고압 케이블, 해저케이블 등 고부가 제품 수요가 급증하면서 내년 실적 개선세가 가팔라질 것으로 증권가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AI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이 구리의 위상을 '닥터 코퍼'에서 미래 산업의 핵심 자재인 '슈퍼 코퍼'로 격상하면서, 산업계의 지형도도 새롭게 그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