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업계가 구조적 저운임과 수에즈 운하 통행 재개의 위기로 인한 업황 부진에 대응하기 위해 공백 운항(Blank Sailing·일시적으로 운항하지 않는 선박) 확대·노선 재편 등을 단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가올 호황 사이클에 대비해 꾸준히 선복량도 늘려가고 있다.

수에즈 운하 통행이 재개되면 톤마일(Ton-mile·화물 중량과 이동 거리를 곱한 값)이 감소하면 운임이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해운업계는 2015년 운임 하락기와 같은 위기로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규모를 키워 경쟁력을 높이려 하는 것이다.

부산신항에 정박한 HMM의 2만4000TEU급 컨테이너선에 컨테이너가 실리고 있다. /HMM 제공

27일 해운 시장 분석 기관인 드류리(Drewry)에 따르면 이달 전 세계 해운사들이 주요 노선에서 결항을 결정했거나 예고한 공백 운항(Blank Sailing)편은 모두 75건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0% 이상 증가한 수치다. 또, 해운사들이 내년 1월 운항편 가운데 결항을 결정한 건수는 현재까지 35건을 기록했다고 해당 기관은 전했다.

해운업계는 공백 운항 증가와 함께 노선 개편도 단행하고 있다. HMM(011200)이 소속된 해운 동맹인 프리미어 얼라이언스는 지난 15일 아시아~북유럽 항로를 개편해 FE3 노선의 11개 기항지를 8개로, FE4 노선의 13개 기항지를 5개로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다른 해운 동맹인 제미나이 얼라이언스와 오션얼라이언스도 일부 노선의 축소를 결정한 상태다.

해운사들의 이같은 행보는 해상 운임이 낮은 수준에서 횡보하고 있는 만큼 비용을 줄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상하이를 기점으로 하는 주요 항로 운임 지수인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 26일 기준 1656.32를 기록했다. 직전 주 대비 6.7% 올라 상승세를 이어갔으나,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32.7% 낮은 수준이다.

SCFI 지수는 화물 수요가 크게 늘었던 코로나19 시기 5000선을 기록한 이후 지속 하락세를 보이다가 지난해 말 홍해 사태가 발발하면서 한동안 상승세를 기록했다. 그러다 다시 내림세로 돌아서면서 올해 평균 1581.34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수치보다 36.9% 낮은 수준이다.

이러한 운임 하락세는 코로나19 호황기 선사들이 발주한 신조 선박의 인도가 이뤄지면서 공급이 수요에 비해 크게 늘고 있어서 생기는 일이다. 지난해 2억4600만TEU(1TEU=20ft 컨테이너 1개)를 기록한 컨테이너선 물동량은 올해 3.5% 증가한 2억5500만TEU를 기록한 뒤 2028년까지 2억7800만TEU로 증가할 전망이다.

그러나 지난해 3080만TEU을 기록한 선복량(배에 실을 수 있는 짐의 양)은 올해 6.6% 증가한 3280만TEU를 기록한 뒤 2028년까지 3890만TEU로 늘어날 전망이다. 물동량은 오는 2028년까지 12.9%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 데 비해 선복량 증가율은 26.3%나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CMA-CGM, 중국 COSCO, 대만 에버그린 등이 속한 오션 얼라이언스가 내년부터 수에즈 운하 통행을 재개한다고 밝히면서 수에즈 운하 정상화가 가시화하고 있다. 수에즈 운하를 통한 운항이 본격화하면 홍해 사태 이전 수준까지 해상 운임이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홍해 사태 발발 전인 2023년 SCFI는 평균 1005.79로 코로나19 특수로 호황을 누렸던 직전 연도 SCFI 평균(3410.20) 대비 70.5%나 급락했다. 2023년 SCFI 평균치는 올해 평균보다도 35.2% 낮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은 내년 SCFI 지수가 1100수준을 기록할 수 있다고도 전망했다.

해운 업계는 이러한 업황 부진 전망에도 신조(新造·새로 만듦) 발주나 중고선 매입을 이어가며 선복량을 늘려가고 있다. 공백 운항을 늘리고, 노선을 개편해 비용을 줄여 위기에 대응하면서도 향후 호황기를 대비해 몸집을 불리는 것이다.

해운 시장 분석 기관 라이너리티카에 따르면 2025년 발주된 전체 컨테이너선은 508만TEU로 전년 대비 6.5% 증가하며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HMM의 올해 3분기 컨테이너선 선복량은 97만TEU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6% 증가했다. 내년에도 메탄올 추진 9000TEU 컨테이너선 3척 인도가 예정돼있는 상황이나, 지난 10월에도 1만3000TEU급 컨테이너선 12척을 추가 발주했다.

전체 컨테이너 선복량이 14만TEU 수준인 장금상선 역시 올해 처음으로 1만3000TEU급 컨테이너선 4척을 발주한 상태다. 7만TEU의 선복량을 기록하고 있는 SM상선도 중형선을 중심으로 꾸준히 규모를 키우고 있다.

이러한 선사들의 행보는 해상 운임이 손익분기점을 밑돌았던 2015~2016년 수준까지는 하락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어서다. 2010년 1367.45를 기록한 SCFI 지수는 2016년 652.59까지 하락했다. 이로 인해 한진해운을 비롯한 선사들이 경영난을 버티지 못하고 파산했다.

당시 해상 운임 하락은 덴마크 머스크(Mearsk)를 비롯한 글로벌 선사들이 후발 선사들을 경쟁에서 퇴출시키기 위해 '주7일 운항' 등의 서비스를 운영해 운임을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해운사들이 코로나19 호황기 쌓아둔 이익을 기반으로 재무 구조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대형선사들이 경쟁을 위해 의도적으로 운임을 끌어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대표적인 국적 컨테이너선사인 HMM(011200)의 경우 2016년 부채비율은 362%, 유동비율은 159%였으나, 올해 3분기 기준 부채비율은 25%에 불과하고 유동비율은 601%에 달한다.

SM상선도 2016년 부채비율과 유동비율이 각각 150%, 159%였으나 지난해 기준 14%와 360%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장금상선은 부채비율과 유동비율이 각각 203%, 56%에서 38%, 368%로 개선됐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공급 과잉에 따른 운임 하락 전망이 지배적이나 과거 위기와는 달리 선사들의 건전성이 양호한 상태라 대형 선사들이 출혈 경쟁을 통해 운임을 끌어내릴 유인이 적다"면서 "환경 규제 등으로 노후선 폐선이 많아지면 공급 과잉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