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50만톤(t) 감산으로는 회생이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90만t, 나아가 140만t 감산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급 과잉으로 어려움을 겪는 석유화학 업체들이 정부로부터 구조조정(생산설비 감축) 압박을 받는 가운데, 여천NCC의 김길수 공동대표가 적극적인 감축을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천NCC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생산능력 국내 3위 업체다. 한화솔루션(옛 한화석유화학)과 DL케미칼(옛 대림산업)이 지분을 50%씩 가진 합작사다.

지난달 말 롯데케미칼,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케미칼은 충남 대산 석유화학 산업단지에서 운영 중인 나프타분해시설(NCC·Naphtha Cracking Center) 설비 감축을 위한 사업재편계획을 공동으로 마련해 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김길수 여천NCC 공동대표. / 여천NCC 제공

정부는 여천과 울산 등의 석유화학단지에서도 감축안을 제출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상황이다. 여천NCC는 지난 8월부터 3공장 가동을 중단한 상태다. 여천NCC 1·2공장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각각 90만t, 3공장은 50만t이다.

김 공동대표는 정부가 추진 중인 석유화학 자율 구조조정에 적극 협조하는 한편 사업 정상화에 힘을 쏟기 위해 1공장이나 2공장의 가동 중단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김 공동대표는 11일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대주주인 한화솔루션·DL케미칼과의 원료공급계약 체결을 내일 확정한다"며 "원료 가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구안의 끝이 아니다. 여천NCC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선 석유화학 전반의 공급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공장 3개 중 2곳을 끄는 것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천NCC는 올해 운용 자금이 소진되고 차입금 상환 여력이 없어 부도 위기에 몰렸다가 대주주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석유화학 업황 부진과 중국발 공급 과잉 등 구조적 악화로 인해 지난 8월부터 여수 국가산단 내 세 공장 중 3공장 가동을 멈췄다.

이후 여천NCC는 산업은행을 포함한 채권단에게 자구책을 마련해 전달하기로 했다. 자구책 중 하나가 내일 확정될 에틸렌을 포함한 원료공급계약이다.

여천NCC는 여수국가산단에서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인 나프타(납사)를 고온·고압으로 분해해 에틸렌, 프로필렌과 같은 석유화학 원료를 만드는 나프타분해시설(NCC)을 운영한다. NCC에서 나온 에틸렌, 프로필렌 등을 여수국가산단에 있는 한화솔루션, DL케미칼에 공급한다. 이에 대한 공급 가격 계약을 이번에 체결하기로 한 것이다.

김 공동대표는 "그동안 여천NCC는 주주사 간 이해관계와 시장 변동성 속에서 예측 가능한 원료가격 기준이 없는 상태로 운영됐다"면서 "외부 회계법인의 원료가격 컨설팅 결과가 여천NCC가 시장 대비 불리했던 조건에서 벗어나 정상정인 원가를 받을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이를 토대로 여천NCC가 계약에 기반한 사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천NCC 제2공장 전경. / 여천NCC 제공

여천NCC가 컨설팅 결과를 기반으로 만든 자구책에는 원료공급계약을 통한 원가 구조 정상화 외에 고정비 축소,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등이 담길 예정이다. 김 공동대표는 "2025년 8월 이전처럼 3개 공장을 80%씩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가동하는 공장 개수 자체를 줄이면 에너지 절감과 인력 재배치를 통해 수백억 원을 절감할 수 있다"며 "여기에 임원 급여 반납, 구매·영업 혁신까지 더하면 내년에는 올해보다 1100억원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자구안 100% 이행 어려울 수도, 업황 둔화 감안해 NCC 최대 140만톤 줄여야"

그러면서 김 공동대표는 NCC 설비를 추가로 가동 중단하는 방안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가 정상화를 포함한 자구책만으로는 채권단이 원하는 수준의 재무 안정성과 신용도 회복을 달성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공동대표는 "자구책 이행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자구노력이 100% 달성된다는 보장이 없는데다 주요 기관의 올해 4분기 이후 석유화학 업황 전망도 좋지 않다"며 "한화솔루션·DL케미칼과 맺은 원료 공급가격이 수출 가격보다 높은 만큼 해당 수요를 맞출 수 있을 만큼만 NCC 설비를 가동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 공동대표는 NCC 설비를 감축할 때 '작은 규모의 공장부터 줄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공장 대신 1공장이나 2공장을 세우고, 필요할 경우 3공장도 세우는 방식이다.

김 공동대표는 "중국발 공급 과잉이 벌어지고 있고 다운스트림 수요 역시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90만톤 규모인 1·2공장 모두를 안정적으로 돌리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정부가 추진 중인 석유화학 구조조정 정책에 부합하는 동시에 여천NCC의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선 지금 가동을 중단한 3공장 외에 1·2공장 중 한 곳을 추가로 가동 중단하는 방안까지 고려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 공동대표는 "채권단이 여천NCC에 요구하는 것은 일회성 구조조정이 아니라 원리금 상환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창출 구조"라며 "여천NCC가 컨설팅 결과를 토대로 원가 정상화의 토대를 다지고 정부가 요구하는 NCC 감축 목표를 이행하기 위해선 과감한 설비 감축과 포트폴리오 전환을 통해 내실 있는 NCC 회사로 재탄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김 공동대표는 3공장 외에 1·2공장 중 한 곳에 대한 가동을 추가로 중단하는 것은 아직 개인의 생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 공동대표는 "여천NCC의 최종 의사결정은 공동 주주와 이사회, 채권단 및 정부와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며 "여천NCC가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석유화학 기업 10개와 산업통상부는 경기 침체 등으로 에틸렌 수요가 줄어들자 지난 8월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석유화학산업 재도약을 위한 산업계 사업 개편 자율 협약식을 갖고 전체 NCC 생산 규모(1470만톤)의 18~25%인 270만~370만톤t을 줄이기로 했다. 지금까지 석유화학 업계에서 사업재편계획을 내놓은 곳은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