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겨냥한 한국과 중국 배터리 기업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시장점유율 기준 세계 1위 배터리 기업인 중국 CATL이 유럽에 세 번째 공장을 짓기로 하면서 유럽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한국 배터리 3사는 유럽에 전기차용 배터리 공장을 뒀다.

CATL의 유럽 내 배터리 공장이 양산을 시작하면, 한국 배터리 3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있던 완성차 업체가 물량 일부를 CATL로 넘길 수 있다. 최근 들어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수급처 다변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럽에 공장을 둔 한국 배터리 소재사는 CATL이라는 새로운 고객을 확보할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된다.

7일 외신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CATL과 스텔란티스 합작 법인은 지난달 26일(현지 시각) 스페인 아라곤에서 배터리 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CATL은 이 공장에서 연간 50기가와트시(GWh) 규모의 전기차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생산할 예정이다. 전기차 약 70만~10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2026년 말 부분 가동을 시작해 2028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 CATL과 스텔란티스가 41억유로를 투자하고, 유럽연합(EU)이 3억유로의 지원금을 보조할 예정이다.

중국 CATL과 스텔란티스(Stellantis)가 설립한 합작법인인 '컨템퍼러리 스타 에너지(Contemporary Star Energy, SL)'가 26일(현지 시각) 스페인 아라곤에서 배터리 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 CATL 홈페이지 갈무리

CATL은 유럽에서 이미 공장 1곳을 가동 중이고 1곳은 짓고 있다. 14GWh 규모인 CATL 독일 공장은 2022년 말부터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에 들어갔다. 헝가리 데브레첸에 짓고 있는 100GWh 규모 공장은 내년 초부터 배터리 생산을 시작한다. 여기에 스페인에도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CATL이 유럽 공장을 늘리는 것은 중국 기업이 공략할 수 있는 마지막 전기차 시장이 유럽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은 규모로 봤을 때 중국이 1위, 유럽이 2위, 미국이 3위다.

중국 전기차 시장은 이미 CATL 등 중국 배터리 기업이 장악했다. 미국 시장은 중국 기업이 넘볼 수 없는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정부가 중국 기업에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시장이 유럽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반대로 한국 배터리 기업도 유럽 전기차 시장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국 시장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진입하기 어렵고, 미국 전기차 시장 수요는 트럼프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면서 둔화했기 때문이다.

◇ CATL 행보에 긴장하는 배터리 3사, 기회 노리는 배터리 소재사

CATL의 공격적인 행보는 유럽에 공을 들이고 있던 한국 배터리 3사에 위협 요인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브로츠와프, 삼성SDI는 헝가리 괴드, SK온은 헝가리 코마롬과 이반차에 유럽 전기차용 배터리 공장을 뒀다.

이는 완성차 업체의 전기차 공장이 독일은 물론 인건비가 저렴한 동유럽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CATL의 헝가리, 스페인 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면 한국 배터리 3사가 지녔던 지리적 이점은 사라진다.

무엇보다 한국 배터리 3사가 맡았던 유럽 공장 물량 일부가 CATL로 넘어갈 수 있다. CATL은 지난 2022년 헝가리 공장을 데브레첸에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메르세데스 벤츠, BMW, 스텔란티스, 폴크스바겐 등 고객의 자동차 공장과 가깝다"고 설명한 바 있다.

CATL이 언급한 고객사는 한국 배터리 3사와 상당 부분 겹친다. LG에너지솔루션 폴란드 공장 주요 고객사는 폴크스바겐·포드·르노·볼보 등이다. 삼성SDI 헝가리 공장 주요 고객사는 BMW·폴크스바겐·스텔란티스, SK온 헝가리 공장의 주요 고객사는 포드·폴크스바겐이다.

LG에너지솔루션 폴란드 공장. / LG에너지솔루션 제공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CATL의 고객사가 아닌 완성차 업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부분브랜드의 전기차에는 CATL 배터리가 들어간다"라면서 "전기차 공급량이 늘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복수의 배터리 업체와 계약하는 분위기라 한국 배터리 물량 일부가 빠져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배터리 업계에선 유럽에서 CATL과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시기가 언제일 지는 CATL 헝가리 공장이 내년 초 양산에 들어간 이후 빠르게 안착할지에 달려있다고 입을 모은다. 유럽에서 공장을 운영하려면 유럽 현지 인력을 고용하는 것은 물론 EU의 환경 규제에 맞춰 유럽의 배터리 공급망을 활용해야 한다. 한국 배터리 3사 역시 유럽 공장에서 한국 공장 수준의 수율이 나오기까지 상당 시간이 걸렸다.

업계 관계에서자는 "CATL이 중국 공장에서는 세계가 인정하는 배터리를 만들었지만, 유럽에서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며 "인력·규제·공급망 변화를 이겨내고 조기 안정화에 성공한다면 CATL의 저력을 인정할 수 있지만, 아직은 상황을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는 2018년부터, SK온은 2022년부터 유럽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며 "CATL이 100GWh 규모인 헝가리 공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 내 한국 배터리 3사는 CATL과 경쟁을 벌이겠지만, 에코프로 등 한국 배터리 소재사는 수혜를 볼 것으로 보인다. 유럽 전기차 시장이 성장하기만 하면 한국 배터리 3사는 물론 CATL을 고객사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배터리 소재사는 최근 들어 유럽 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솔루스첨단소재는 헝가리에 전기차 전지박(배터리용 동박) 생산 기지를 운영 중이다. 솔루스첨단소재는 지난달 26일 글로벌 10위권 중국 배터리 회사와 2만톤 규모의 전지박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026년 말부터 생산을 시작해 2027년 본격 양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스페인 카탈루냐주에 연간 3만톤 규모의 동박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이다. 2027년 하반기 완공이 목표다. SK넥실리스도 2022년 7월, 폴란드에 착공한 동박 공장 완공을 앞두고 있다.

에코프로는 지난달 28일 헝가리 데브레첸에 연간 생산능력 5만4000톤(t) 규모의 양극재 공장 준공식을 가졌다. 에코프로의 양극재 전문 자회사인 에코프로비엠은 헝가리 공장에서 삼원계 배터리에 들어갈 하이니켈 삼원계 양극재를 내년부터 생산할 예정이다. 생산 규모는 전기차 약 6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이후 에코프로비엠은 고객 수요에 맞춰 미드니켈, LFP용 양극재로 제품군을 넓힐 계획이다.

주민우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중국 양극재 업체가 유럽 현지에 진출하고는 있지만,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중국 양극재에 100% 의존하기는 어렵다"며 "유럽 현지 공장을 운영하는 유일한 업체인 에코프로비엠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