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협동로봇 시장 선두 주자인 두산로보틱스의 경기 수원공장에 찬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돌아가야 할 생산 라인이 멈춰 서면서 올 3분기 말 기준 가동률은 16.4%에 그쳤습니다. 연간 2200대를 찍어낼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도, 올해 9월까지 만든 로봇은 고작 271대뿐입니다. 지난해 같은 기간 가동률이 69.6%였던 것과 비교하면 4분의 1토막이 됐습니다. 2015년 설립 이래 최다 라인업을 구축하며 시장을 호령하던 두산로보틱스가 혹독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겁니다.
업계에서는 협동로봇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전 수요 정체기에 갇혔다고 평가합니다. 두산로보틱스의 대표적인 경쟁사인 미국 유니버설 로봇과 국내 뉴로메카는 공장 가동률과 생산 실적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의 3분기 매출은 전년 대비 각각 약 16%, 28% 뒷걸음질 쳤습니다. 유니버설 로봇의 모회사인 테라다인은 3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전방 산업의 투자가 여전히 위축되고 있어 로봇 팔 시장의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 확장 한계 다다른 '로봇 팔' 사업
두산로보틱스는 대외적으로 가동률 하락 요인을 '외부 환경 악화'로 설명합니다.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제조업체들이 지갑을 닫았고, 최대 시장인 북미 지역의 정책 리스크로 투자 심리가 쪼그라들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역 장벽을 세우면서 관세 정책이 요동치자 현지 고객들은 투자를 연기하고 관망세로 돌아선 겁니다. 이 때문에 로봇 팔 재고는 쌓여왔습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번 위기의 근본 원인이 로봇 팔 자체의 사업성 한계에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두산로봇틱스는 로봇의 '팔'에 해당하는 본체(매니퓰레이터) 판매에만 주력해 왔습니다. 문제는 이 로봇 팔만 가지고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제조 현장에서는 "로봇 팔만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니라, 고도화된 비전 인공지능(AI)과 소프트웨어가 탑재돼 공정 전반을 매끄럽게 처리해 주는 완결형 로봇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빗발쳤습니다. 게다가 기존 공장에 로봇을 투입하려면 생산 라인을 멈추고 설비를 재설계해야 하는데, 당장 공장을 돌려야 하는 제조사 입장에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겁니다.
결국 '로봇 팔' 단품만 팔아서는 대량 수주를 따내기가 불가능한 구조적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최승환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협동로봇은 통상 수주 한 건당 공급되는 로봇이 15대 안팎에 그쳐, 사업 덩치를 키우기엔 제한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됐습니다. 두산로보틱스의 올해 3분기 누적 영업손실은 430억원에 달해, 이미 지난해 연간 적자 규모(412억원)를 넘어섰습니다.
◇ 로봇 팔 대신 '지능형 로봇 솔루션' 판다… "실적 반등 2~3년 걸려"
생존을 위한 돌파구가 절실한 시점에 두산로보틱스가 꺼내 든 카드는 '통합 AI 로봇 솔루션' 회사로의 변신입니다. 단순히 로봇 팔을 파는 게 아니라, 용접이나 적재 등 특정 작업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를 팔겠다는 포부입니다.
지난 9월 미국의 로봇 솔루션 통합(SI) 기업 원엑시아를 인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원엑시아는 제조, 물류, 포장 분야에서 자동화 시스템을 설계하고 공급하는 데 특화된 기업입니다. 두산로보틱스는 이 인수를 통해 로봇 설치부터 운영까지 노하우를 흡수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고객에게 '알아서 다 해주는' 맞춤형 자동화 시스템을 턴키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두산로보틱스는 추가 인수·합병(M&A)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체질 개선은 리더십의 변화에서도 읽힙니다. 두산로보틱스는 지난 2월 신임 최고경영자(CEO)로 토스 출신의 김민표 부사장을 선임했습니다. 묵직한 제조 기업이 핀테크 출신의 전략가를 수장으로 앉힌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여기에 지난 9월엔 토스증권 CTO 출신의 오창훈 전무를 영입해 AI와 소프트웨어 개발을 주도할 총괄 책임자로 앉혔습니다. 로봇 팔을 만드는 하드웨어 회사에서, 소프트웨어와 AI를 아우르는 유연한 플랫폼 기업으로 체질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의지를 보인 겁니다.
실제로 올 하반기 들어 두산로보틱스 R&D(연구개발)의 축은 하드웨어 일변도를 벗어나 소프트웨어에 방점이 찍혔습니다. 경기 성남시에 석 달 전 문을 연 국내 최대 규모의 로봇 연구소에는 100여명의 연구 인력이 상주하며 AI 로봇 제어와 소프트웨어 기술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에 맞춰 하드웨어도 지능형 로봇 솔루션으로 진화 중입니다. 제자리에 고정돼 있던 로봇 팔에 AI 두뇌와 이동형 로봇(AMR)을 결합해 다리를 달아주는 시도를 내부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두산로보틱스의 리빌딩이 2~3년 뒤를 겨냥한 포석이라고 봅니다. 두산로보틱스 관계자는 "지금은 개발과 인력 확보에 투자를 집중하는 시기로, 실적 가시화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두산로보틱스가 팔을 넘어 두뇌와 몸 전체를 갖출 수 있을까요. 그 실험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