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기기 업체들이 초고압직류송전(HVDC·High Voltage Direct Current)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정부가 인공지능(AI) 시대에 대비해 전력망 확충 프로젝트(동해-수도권 송배전망 사업·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등)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다.

4일 전력기기 업계에 따르면 LS일렉트릭(LS ELECTRIC(010120))은 이날 부산 초고압 변압기 생산공장 증설 준공식을 열었다.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초고압 변압기 생산 능력이 기존 대비 3~4배 늘어날 전망이다.

LS일렉트릭은 4일 부산 강서구 화전산단에 있는 부산 사업장에서 제2 생산동 준공식을 가졌다. 이호현 기후환경에너지부 제2차관(왼쪽 여덟 번째),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왼쪽 아홉 번째), 박형준 부산광역시장(왼쪽 열 번째), 구자은 LS그룹 회장(왼쪽 열한 번째), 등 관계자가 신규 준공된 2생산동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LS일렉트릭 제공

HVDC는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AC(교류·Alternating Current) 전력을 고압의 DC(직류·Direct Current) 형태로 변환시켜 송전한 뒤 수요지 인근에서 다시 교류로 변환해 공급하는 기술이다. LS일렉트릭은 공장 증설 외 기술 투자도 진행 중이다. 지난 7월 글로벌 에너지 설루션 기업인 GE버노바(Vernova)와 HVDC용 변환설비 국산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지난해에는 GE버노바와 협력해 5610억원 규모의 HVDC 기반 동해안-수도권 송전망 사업을 수행했다.

HD현대일렉트릭(267260)은 올 초 총 2118억원을 투자해 울산 초고압 변압기 공장 증설에 나섰다. 2026년 증설이 완료되면 약 2000억원의 매출 증대가 예상된다. 10월에는 HVDC 분야 글로벌 1위 업체인 스웨덴 히타치에너지와 'HVDC 기술협력 및 국산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국내 최초로 전압형 HVDC 기술을 개발해 기술 자립도를 높인 효성중공업(298040)도 2027년 완공 목표로 3300억원을 투자해 경남 창원에 HVDC 변압기 전용 생산공장을 건설 중이다. 2GW(기가와트)급 전압형 HVDC 기술 개발도 진행 중이다. 주요 3개 업체가 모두 공장 증설 혹은 글로벌 업체 협약을 통해 투자를 늘리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산화한 전압형 HVDC 기술은 차세대 기술이다. 이를 기반으로 국내 전력망 사업 수주에 나설 예정"이라고 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해외 대형 업체와 협약을 맺고 기술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어 2027~2028년쯤에는 HVDC 사업 이력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효성중공업이 한국전력 양주 변전소에 공급한 200㎿(메가와트)급 HVDC 시스템. /효성중공업 제공

전력기기 업체들이 미국 등에 주로 수출하는 초고압 변압기 AC(교류) 전력 시스템이나 데이터센터 배전 시스템과 달리 HVDC는 단독 수주가 어려울 만큼 기술 개발이 더딘 분야다. 글로벌 HVDC 시장은 미국 GE버노바·스웨덴 히타치에너지·독일 지멘스에너지 등 3개 업체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이들이 투자를 늘리는 것은 정부가 전력망 확충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신기술 투자도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시대 전력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국내 인프라는 부족한 상황이다. 동해안을 비롯해 남해와 서해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송전망은 크게 부족하다.

정부는 지난달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초혁신 경제 15대 프로젝트 중 하나로 HVDC를 꼽았다. 재정·세제·금융·인재 양성·규제 개선 등 패키지 지원을 제공할 계획도 함께 밝혔다. 또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새만금~서화성)를 2030년까지 계획대로 구축할 수 있도록 산학연 합동 HVDC 인력 양성에도 나선다는 계획이다. HVDC 상용화를 위해 2026년 예산안에 배정한 금액은 120억원이다.

또 세계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인 요소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마켓츠앤마켓츠 등에 따르면 글로벌 HVDC 시장(컨버터 스테이션, 케이블 등 제외)은 2024년 기준 약 122억달러(약 17조9700억원)에 달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연평균 8.1%씩 성장해 2034년에는 약 264억달러(약 38조9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LS일렉트릭 부산 생산공장에서 초고압 변압기 권선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LS일렉트릭 제공

김광식 교보증권 책임연구원은 "HVDC는 글로벌 3개 업체 외 아직 사업 실적이 있는 곳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면서 "신재생에너지 믹스나 데이터센터 증가로 전력을 멀리 보내야 할 필요성은 계속 커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글로벌 업체들과 업무협약을 맺은 국내 업체들이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나 동해안 송전망 등 정부 추진 프로젝트에서 사업 이력을 쌓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동헌 신한투자증권 기업분석부 팀장은 "HVDC는 큰 흐름"이라면서 "보수적인 전력 사업 특성상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내 사업과 투자를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