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하반기 흑자 전환에 성공한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096770),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 S-Oil(010950))가 내년에도 실적 개선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공급 과잉 우려로 국제 유가가 연일 하락하는 가운데 전 세계 정유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석유 제품 공급이 제한적인 상황이라서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되면, 러시아산 원유 공급이 늘어나 국제 유가 하락을 더 부추길 것으로 보인다.
4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의 4분기 예상 영업이익은 3320억원, 내년 1분기는 3682억원, 2분기는 3662억원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S-Oil의 예상 영업 이익은 2886억원→2785억원→3770억원으로 점쳐진다. 유사한 사업 구조를 가진 비상장사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도 비슷한 실적 흐름을 보일 전망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올해 3분기 국제 유가가 떨어지는 와중에 정제 마진이 오르면서 호실적을 기록했다. 상반기 정유 4사의 정유 부문 합산 영업 손실은 1조3000억원을 넘었으나, 3분기에는 SK이노베이션 3042억원, GS칼텍스 2464억원, S-Oil 1155억원, HD현대오일뱅크 2297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모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정제 마진이 연일 오르면서 정유업계 수익성이 개선됐다. 정제 마진은 석유 제품 판매 가격에서 원유 가격 등 생산 비용을 뺀 값으로, 수익성을 나타내는 핵심 지표다. 최근 싱가포르 복합 정제 마진은 배럴당 18달러 선에서 가격이 형성됐다. 보통 정유사들의 손익분기점이 되는 정제 마진은 배럴당 4~5달러다.
유가가 내려가면 정유사 입장에선 원재료 값이 떨어지는 게 된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근원물은 올해 초 배럴당 78달러 선에서 거래됐으나 이날 59달러 선으로 떨어진 상태다. 같은 기간 브렌트유, 두바이유 선물 가격도 80달러 선에서 60달러 초반대로 떨어졌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내년 WTI가 배럴당 평균 50달러 초반에서 움직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러·우 전쟁이 마무리되면 국제 유가는 더 떨어질 전망이다. 최근 미국 정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정부와 각각 만나 전쟁 종식을 위한 조건을 협상하고 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생산 확대 기조가 이어지는 데다 미국 내 원유 생산이 늘고 있다"며 "여기에 러·우 전쟁이 종식되면 러시아산 원유가 본격적으로 수출되면서 전 세계 원유 시장 내 과잉 공급 상황이 한층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종전 이후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제재가 완화하면, 최대 120만 배럴의 원유가 추가로 공급될 수도 있다. 미국, 유럽연합 등이 제재 일환으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면서 러시아의 일일 원유 생산량은 전쟁 전 1100만 배럴에서 지난 7월 980만 배럴까지 줄었다. 그간 러시아는 중국, 인도 등에 원유를 팔거나 제재 회피를 위해 국적을 둔갑한 '그림자 선단'을 활용했다.
원유 공급은 늘어나는 반면 미국, 유럽 내 정유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정유 제품 공급은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의 탈탄소화 정책, 시설 노후화, 정제 마진 축소 등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선 필립스 66(Phillips 66)이 하루 12만 배럴을 생산하던 캘리포니아 정유 시설을 폐쇄하고, 재생 연료 생산 시설로 바꿀 예정이다. 마라톤 패트롤리엄(Marathon Petroleum)도 16만 배럴을 생산하던 캘리포니아 시설을 폐쇄하거나 시설 용도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도 주요 정유 시설이 공격당하면서 가동 능력이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원·달러 환율)은 변수다. 원유 대금은 달러화로만 결제된다. 원유를 수입할 때 외화 부채가 생기는데,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원화 환산 부채 규모가 늘어나 환차손이 발생한다. 국내 정유 4사가 1년에 수입하는 원유 규모는 10억 배럴 정도인데, 정제해 수출하는 물량은 절반 정도다. 절반은 달러로 대금을 받고, 나머지는 원화로 받다 보니 외화 부채 상쇄 규모가 제한적이다.
SK이노베이션은 3분기 보고서에서 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이 약 1544억원 감소한다고 밝혔다. 다만 정유사들은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환헤지(Hedge·위험 회피)를 활용하며 영향을 최소화하고 있다.
일각에선 국제 유가가 하락하더라도 내년 실적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정제 마진 결정에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제 유가가 하락해도 수요 위축으로 제품 판매가가 내려가면 정제 마진이 떨어질 수 있다. 또 원유 구입부터 제품 판매까지 1~2개월 시차가 발생하는데,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 미리 구매한 원유 가치가 하락해 재고 평가 손실이 날 수 있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올해 3분기부터 정제 마진이 개선돼 실적이 좋았지만, 내년도 좋을지는 모른다. 종전 협상이 길어지면 유가 변동성이 커져 실적이 출렁일 수 있다. 재고 평가 손익, 정제 마진, 주요 정유 시설의 가동률 등에 따라 내년 실적이 갈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