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주한스위스대사관. 비로 젖은 야외 정원에 스위스 로봇 기업 애니보틱스의 4족 보행 로봇 '애니멀(ANYmal)'이 마치 대형견처럼 네 발을 교차하며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미끄러운 바닥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 수풀 곳곳을 누비며 검사 명령을 받은 나무의 사진을 찍고 기록했다.
이동 중 사람 무릎 높이의 차단봉이 앞을 가로막자, 로봇은 잠시 멈추더니 네 다리의 관절을 굽혀 배를 바닥에 밀착시켰다. 이어 낮은 포복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 차단봉 밑을 부드럽게 통과했다. 대사관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로봇 옆을 예고 없이 뛰어다녔지만, 로봇은 센서로 이를 감지하고 충돌 없이 제 갈 길을 갔다. 이름 뜻 그대로 '어디든(Any) 갈 수 있는 동물' 같았다.
◇험지도 척척… 가스·열 감지하는 '자율 점검 로봇'
이날 한국에선 처음으로 애니멀을 공개 시연한 애니보틱스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Z) 로봇 시스템 연구소에서 분사해 2016년 설립된 회사다. 산업용 4족 보행 로봇 분야에서는 미국의 보스턴다이내믹스와 양강 구도를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1억5000만달러(약 22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영국 에너지 기업 셸, BP를 비롯해 미국 엑슨모빌, 독일 화학회사 바스프 등 전 세계 극한 산업현장에 애니멀을 공급하고 있다.
애니멀은 산업 현장 맞춤형으로 설계됐다. 길이 80㎝, 높이 70㎝에 50㎏로 4족 보행 로봇 중에선 제법 덩치가 있는 편이지만, 거친 환경을 견딜 수 있도록 가볍고 강도가 높은 탄소섬유와 알루미늄 소재로 제작됐다. 미세한 먼지를 차단하고 수심 1m 깊이의 물속에서도 30분간 버틸 수 있는 IP67 등급의 방수·방진 설계도 적용됐다. 폭우가 쏟아지거나 흙먼지가 자욱한 악천후에도 로봇이 평상시처럼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기능적으로는 단순한 이동을 넘어 '데이터 수집'에 특화돼 있다. 로봇은 열화상 카메라, 가스 누출 탐지기, 고성능 마이크 등을 탑재해 시설의 과열, 가스 누출, 이상 소음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한다. 수 양 애니보틱스 아태지역 세일즈 총괄은 "과거 대형 정유공장 사고들은 배관 부식이나 누출 같은 전조 증상이 있었음에도 이 기록들이 개별 보고서에 흩어져 있어 큰 위험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며 "애니멀은 로봇이 수집한 데이터를 중앙 시스템에 즉각 통합해 운영자가 사고 징후를 한눈에 파악하고 막을 수 있게 돕는다"고 설명했다.
◇GPS 없이도 ㎝ 단위 위치 파악해 나는 '케이지 드론'
대사관 실내에서는 축구공만 한 크기의 검은색 구체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시연자가 비행 중인 드론을 손으로 밀치고 몸으로 쳐도 기체는 추락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튕겨 나오더니 금세 균형을 잡고 비행을 이어갔다. 스위스 드론 기업 플라이어빌리티의 '엘리오스 3' 제품으로, 프로펠러가 외부에 노출돼 장애물과 충돌하면 추락하기 쉬운 일반 드론과 달리 탄소 섬유 소재의 둥근 보호대(케이지)가 기체 전체를 감싸고 있어 충격을 흡수하며 비행을 유지했다.
플라이어빌리티는 '충돌을 허용하는 드론'이라는 역발상으로 실내 산업용 드론 시장을 개척했다. 2014년 스위스 로잔 연방 공과대학교(EPFL)에서 분사해 만들어진 기업이다. 현재 원자력 발전소나 하수구 등 GPS(위치정보 시스템)가 닿지 않는 밀폐 공간 점검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40여개국, 1500개 넘는 기업이 이들의 고객이다. 삼성, 포스코, 한화오션, GS칼텍스, 에쓰오일 등 국내 기업들도 사람이 직접 들어가기엔 유독 가스 노출이나 붕괴 위험이 있는 설비 점검에 이 드론을 투입하고 있다.
이들이 '케이지 드론'을 고집하는 것도 복잡한 배관과 철근이 얽혀 있는 산업 현장에서는 장애물을 완벽히 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충돌을 허용하는 설계 덕분에 드론 조종사는 가령 사람의 접근이 힘든 어두운 굴뚝 내부나 저장 탱크 안에서 드론을 벽면에 바짝 붙이거나 굴리면서 미세한 균열 등을 촬영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날 시연에서는 통신이 끊겨도 드론이 스스로 왔던 경로를 되짚어 돌아오는 '신호 복귀' 기능이 특히 주목받았다. 미로 같은 지하 터널이나 두꺼운 콘크리트 벽 뒤에서 신호가 끊기더라도, 드론이 가장 안전했던 경로를 기억해 스스로 통신 가능한 지점까지 복귀하는 기술이다.
윤주수 플라이어빌리티 총괄 매니저는 "드론에 탑재된 라이다 센서가 실시간으로 3차원(3D) 지도를 그리는 슬램 기술을 통해 GPS 없이도 자신의 위치를 ㎝ 단위로 파악한다"며 "내년에는 드론에 초음파 센서를 달아 비행 중에 철판 두께까지 측정하는 기술을 상용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한국에서 첫 시연 행사를 연 건 국내 산업계의 가파른 로봇 수요 증가와 맞물려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강화 등으로 산업 안전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위험한 업무를 로봇으로 대체하려는 국내 기업들의 니즈를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행사를 주관한 주한 스위스 대사관 무역투자청의 안드레아 클레멘티 대표는 "한국은 로봇 도입률과 산업 규모 면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라며 "스위스의 정밀한 로봇 기술이 한국의 거대한 제조 현장에 투입돼 실질적인 난제들을 해결할 때 진정한 의미의 산업 자동화가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