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정부가 4조원 규모의 신형 잠수함 도입 사업인 '오르카 프로젝트'의 파트너로 스웨덴 방산업체 사브를 선정했다. 한국 정부와 한화오션은 기술력 우위를 앞세워 '현역 잠수함 무상 양도' 카드까지 꺼내 들며 총력전을 펼쳤으나, 유럽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의 진입 장벽을 넘지 못했다.
◇ 4조원 사업 스웨덴 사브 품으로… "지정학적 요인 작용" 평가
26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브와디스와프 코시니아크카미시 폴란드 국방장관은 이날 "스웨덴 사브가 모든 기준과 납기, 특히 발트해 작전 능력 측면에서 가장 좋은 제안을 했다"며 오르카 프로젝트 사업자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폴란드 정부는 늦어도 내년 2분기까지 사브와 최종 계약을 체결하고 2030년쯤 첫 잠수함을 인도받을 계획이다. 폴란드 측은 계약 규모를 100억즈워티(약 4조원) 수준으로 추산했다. 다만 현지 전문가들은 무기체계 통합과 수명주기 유지보수 비용 등을 포함하면 총사업비가 360억즈워티(약 14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방산업계는 이번 수주전에서 성능이나 납기 능력보다는 유럽 내 정치적 역학 관계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화오션과 프랑스 나발그룹,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 이탈리아 핀칸티에리 등이 경쟁을 벌였는데, 당초 업계에서는 잠수함 성능이 입증된 한화오션과 핵 공유 지원 가능성까지 내비친 프랑스 나발그룹의 2파전을 예상했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수주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장보고함 무상 양도와 최대 한도의 대출 지원, 후속 군수 지원등 여러 제안을 내놨다.
그런데 막판에 스웨덴 사브가 지정학적 이점을 파고들며 급부상했다. 스웨덴 측은 폴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유지·보수·정비(MRO) 등 후속 군수 지원에 유리하다는 점을 부각했고, 폴란드산 무기를 역구매하겠다는 제안까지 더했다. 한국 측이 배수진을 치며 승부수를 띄웠지만, 유럽 내 지리적·정치적 역학 관계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 현지서도 사브 잠수함 '실증 미비' 지적
업계에서는 스웨덴 사브가 제안한 'A26 블레킹급' 잠수함이 아직 실전 배치된 적 없는 기종이라는 점을 지적해왔다. 이 잠수함은 발트해의 얕은 수심과 복잡한 해저 지형에서 작전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지만, 아직 실전 배치된 적이 없는 모델이다.
폴란드 현지 언론들도 사브의 납기 능력과 검증되지 않은 성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폴란드 국방 전문지 디펜스24는 "스웨덴 해군을 위한 A26 초도함 인도 시기가 이미 수차례 지연된 점을 고려할 때 폴란드가 2030년에 잠수함을 인도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며 "자국군 운용 데이터도 없는 모델을 도입하는 건 리스크가 크다"고 지적했다. 또한 폴란드 해군은 당초 3000톤급 잠수함을 원했으나 선정된 사브 모델은 2000톤급 안팎에 불과하다는 점도 우려점으로 꼽혔다.
반면 한화오션은 폴란드 해군이 당초 요구했던 장기 잠항·무장 능력을 충족하기 위해 공기불요추진체계(AIP)와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하고, 디젤 잠수함 중 세계 최초로 수직발사관(VLS)을 장착한 3600톤급 '장보고-III 배치-II'를 제안했다.
업계 관계자는 "장보고-III 배치-II는 이미 한국 해군에 실전 배치돼 성능이 입증된 반면 A26은 스웨덴 해군조차 아직 인도받지 못한 사실상 설계도상의 모델"이라며 "잠수함 기술력만 놓고 보면 사실상 한국의 기술력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아 이번 수주에서 기대감이 컸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한국 정부는 신규 잠수함이 건조되기 전까지 폴란드 해군의 전력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해군이 현재 운용 중인 1200톤급 '장보고-I(209급)' 잠수함을 무상으로 양도하겠다는 제안을 내놨다. 하지만 결국 유럽의 정치적 결속력을 깨지는 못했다는 평가다.
◇ "안보 협력 무게추 유럽으로"
정부와 업계 안팎에서는 한국산 무기 쏠림 현상에 대한 유럽 내 경계심도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국은 이미 폴란드에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천무 다연장로켓 등을 대규모로 수출하며 폴란드 국방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해군 핵심 전력인 잠수함까지 비유럽권 국가인 한국에 맡기는 것은 폴란드로서도 NATO와 유럽연합(EU) 동맹국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일각에서는 영국과 스웨덴으로 이어지는 유럽 내 정치적 역학 관계가 이번 선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나온다. 폴란드는 현재 영국 방산업체 밥콕과 '애로우헤드 140' 호위함 사업 등을 협력하고 있는데, 영국과 긴밀한 방산 협력 관계인 스웨덴 사브가 선정된 배경에 영국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업계 관계자는 "폴란드 입장에서는 안보 협력의 무게추를 나토 회원국인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과 맞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며 "성능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유럽 내 파트너를 선택한 셈"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