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석유화학 업계 구조조정 '데드라인'으로 정한 연말이 다가오는 가운데 석유화학 기업들의 신용 등급 강등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다. 일부 석유화학 기업의 재무제표는 신용평가사가 제시한 신용 등급 하향 기준을 한참 넘어선 상태다. 사업 재편 이후 재무 구조가 빠르게 개선되지 않으면 내년 상반기에는 신용 등급이 줄줄이 강등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24일 기준 국내 3대 신용평가사(한국기업평가·한국신용평가·나이스신용평가) 중 최소 1곳 이상에서 신용 등급 전망 '부정적'을 받은 석유화학 기업은 총 8개사로 나타났다. LG화학(051910)(AA+), SK지오센트릭(AA-), 한화토탈에너지스(AA-), HD현대케미칼(A), 여천NCC(A-), SK피아이씨글로벌(A-), SK어드밴스드(BBB+), 효성화학(298000)(BBB) 등이다.
신용 등급 전망이 '부정적'이라는 건 향후 신용 등급이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신용 등급이 떨어지면 채권을 발행하거나 대출을 받을 때 더 높은 금리를 적용받는다.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는 셈이다. 일부 대출 계약에선 신용등급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경우, 조기 상환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기도 한다.
지난해 6월 신평사 세 곳으로부터 등급전망 '부정적'을 받은 HD현대케미칼(A)은 이미 등급 하향요인을 충족한 상태다. 한국기업평가는 HD현대케미칼의 신용등급 하향요인으로 순차입금/상각전영업이익(EBITDA)이 6.5배 이상이거나, 차입금의존도가 45% 이상일 경우로 두고 있다. 영업활동으로 버는 돈으로 부채를 얼마나 갚을 수 있는지 가늠하는 재무 지표다.
HD현대케미칼의 2022~2024년 평균 순차입금/EBITDA는 13.6배, 차입금의존도는 60%로 나타났다. 지난 3월말 기준 EBITDA는 마이너스(-) 528억원으로 나와 지표 계산이 무의미해졌다.
지난 8월 부도 위기에 휘말린 여천NCC(A-)도 신평사 두 곳에서 등급 전망 '부정적'을 받았다. 여천NCC의 올해 3분기 부채 비율은 345.82%로, 한국신용평가가 제시한 등급 하향 기준(부채 비율 350% 초과)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달 20일 주주사인 DL케미칼은 여천NCC 대여금 1500억원을 출자 전환하며 부채 비율 개선에 힘쓰고 있다. 한화솔루션도 대여금 출자 전환을 진행할 예정이다. 내년 3월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규모가 2100억원인 데다 사업 전망이 여전히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BBB급으로 떨어지면 채무 상환 압박이 거세질 전망이다. 여천NCC가 발행한 79회, 80회 무보증 사모사채 상환 조건에는 '회사채 BBB+ 등급 이하로 하향 평가'가 붙어 기한이익상실(EOD) 사유가 된다. 77회, 85회 사모사채에는 어느 한 회사채의 기한이익이 상실될 때 연동한다는 요건이 달려 있다.
SK어드밴스드(BBB+), 효성화학(BBB)도 '부정적' 등급 전망을 받은 상태다. 이미 투기 등급에 해당해 기관 투자자들의 회사채 투자 수요가 적다.
주요 석유화학 기업은 올해 연말까지 NCC 기준 최대 370만톤(t)의 설비 감축을 목표로 사업 재편을 구상하고 있다. 기업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려 현재까지 자구안을 제출한 기업은 없다.
유준위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석유화학 기업의 경우, 등급 하향 요인을 충족했는지보다 구조조정 이후 얼마나 변화하는지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사업 재편까지 걸리는 시간, 효과 등을 고려해 내년 상반기 신용 평가에 반영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성원 나이스신용평가 IS실장은 "석유화학 업황 전망이 좋지 않은 게 사실이다. 사업 재편 말고는 다른 모멘텀이 없다. 연말까지 기업들이 내놓을 자구안을 파악하고, 이르면 내년 1분기 신용 평가에서 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